베스트 최신글
자유/잡담 추천 0

첫 자취 시절 이웃과 맺은 조심스러운 인연

2026-06-04 08:14:13 조회 10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첫 자취 시절, 세상에서 가장 조용해야 할 것 같은 시간들이 오히려 더 시끄럽게 느껴지던 밤들이 있었다. 신입 자취생이라 그런지 몰라도, 냉장고 소리며 옆집 드릴 소리며 다 내 일처럼 크게 들렸고, 무엇보다 “이웃이랑 어떻게 지내야 하지?”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처음 들어온 날부터 마음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월세 계약 끝나고 열쇠 받고, 박스 옮기고, 가구 하나 둘 배치하다 보니 손님이라도 온 듯 집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복도 쪽으로 나가게 됐는데, 맞은편에 사시는 분이 계단에서 내려오다가 우리 동네 인사법(?)을 이미 알고 계신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라. 나는 “안녕하세요”를 너무 빨리, 너무 작게 말해서 본인도 놀라셨을까 싶었다.

그분이 나를 붙잡은 건 아니었는데, 이후로 몇 번의 작은 사건이 쌓이면서 인연의 모양이 생겼다. 예를 들어, 어느 날은 수도꼭지가 살짝만 틀어도 물이 뚝뚝 떨어져서 새벽에 물소리가 신경 쓰이는데도 계속 참고 있었거든. 그러다 아침에 복도에서 마주치자 그분이 “밤에 물 소리 들리던데 괜찮으세요?”라고 말해줬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내 집 사정까지 대충 파악하고 계셨다는 게 약간 부담이면서도 고마웠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웃 관계를 ‘친해져야 하는 건가’ ‘최대한 예의 있게 거리 두면 되는 건가’ 사이에서 계속 저울질했다. 연락처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진 않았지만, 대신 서로의 생활 리듬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가까워졌다. 예를 들면 쓰레기 버릴 시간, 택배 받는 날, 가끔 있는 소음 같은 건 최대한 정해진 범위 안에서 처리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분도 대놓고 “조심하세요” 같은 말은 안 했는데, 먼저 인사를 하면서 분위기를 맞춰주는 편이었고 그게 신기하게도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한 번은 진짜로 조심성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 냉장고를 들여놓고 나서 문턱 근처에 작은 철제 받침을 놓았는데, 바닥이 고르지 않아서인지 미세하게 흔들리더라. 밤에 잠깐 다리 받침을 다시 고치다가 소리가 조금 났나 봐. 몇 분 뒤에 초인종이 울리는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어. 문 열기 전까지 “아, 내가 진짜 민폐였나” 하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문을 열고 보니 그분이 아니라 아래층 아주머니가 잠깐 내려오시라고 했던 상황이랑 얽혀 있었는데, 어쨌든 복도는 금방 조용해졌고 나는 그제야 숨을 돌렸다. 돌아서서 다시 정리하고 있는데, 뒤에서 그분 목소리가 들리더라. “괜찮아요? 밤에 뭐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얼떨떨해서 “죄송합니다, 금방 고칠게요”라고 연달아 말해버렸다. 그분은 웃으면서 “자취는 원래 이런 날이 있는 거죠. 너무 혼자 끙끙대지 마세요”라고, 딱 그 정도만 해주고 돌아갔다.

그 이후로 인연은 더 이상 커지지도, 끊기지도 않는 중간 지점에 머물렀다. 서로의 안부를 매번 캐묻지는 않되, 필요할 때는 손이 닿는 거리에서 확인해주는 느낌. 예를 들면 내가 이사 짐 정리하면서 상자를 너무 늦게까지 복도에 두자 그분이 먼저 말을 걸었고, 나는 “내일 정리하려고 했는데 방해됐으면…” 하며 바로 들고 들어갔다. 반대로 그분이 갑자기 며칠 집을 비우는 것 같을 때는, 우편물이나 택배가 쌓이지 않게 문 앞에 잠깐 걸어두는 정도의 ‘눈치’만 챙겼다. 딱 그만큼, 너무 티 나지 않게. 그래서 편했다. 나는 그 관계가 ‘민폐는 줄이고, 불안도 줄이는’ 방식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둘 다 타이밍이 맞아 우연히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날이 흐리던 저녁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는데, 내가 장난처럼 “이 동네는 인사가 생존기술 같아요”라고 말했더니 그분이 “맞아요. 안 친한데도 서로 신경 쓰게 되죠”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자취가 처음이면 마음이 예민할 수밖에 없잖아요. 누가 뭐라 하면 더 움츠러들고요.” 그 말이 내 마음을 딱 짚은 듯해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웃기만 했다.

그분과의 인연은 결국 친한 친구가 되진 않았다. 연락처를 공유해도 매일 대화하는 사이가 아니고, 큰 일도 같이 겪진 않았다. 대신 첫 자취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새 환경에서의 긴장, 그리고 남에게 피해 줄까 봐 생기는 과한 자기검열—그걸 조금씩 완화해주는 존재가 되어줬다. 지금도 가끔 복도에서 누군가 나와 마주치면, 그때의 조심스러운 인사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첫 자취 시절의 이웃은, 결국 ‘가까워지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 아니라 ‘거리 두는 법’을 함께 지켜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낯선 곳에 들어가면, 먼저 인사를 하고, 필요 이상으로 채우지 않되, 이상 신호가 보이면 조용히 확인하는 습관을 유지하게 됐다. 그 조심스러움이 어쩌면 좋은 인연의 형태였던 것 같다.

이 글 반응 남기기
추천과 비추천은 회원당 1회만 가능하며, 다시 누르면 취소됩니다.
추천 0 · 비추천 0
글 신고 안내
같은 회원은 같은 글이나 댓글을 1회만 신고할 수 있으며, 누적 신고가 5회 이상이면 자동으로 숨김 처리됩니다.
현재 글 신고 0회

댓글

댓글 작성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