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뒷산에 세워진 오래된 무너진 비석
시골집 뒷산에 세워진 오래된 무너진 비석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별생각 없었어. 여름 장마가 지나고 나서 풀들이 한껏 자라서 길이 다 잠기길래, 아버지 따라 산 쪽으로 밭 경계 확인하러 갔거든. 그런데 그날은 바람이 이상하게 불었는지, 덤불 사이에서 돌을 긁는 소리가 들리더라. 마치 누가 아주 천천히 비석을 밀어내는 것 같은 소리. 나는 그냥 벌레 소리려니 했는데, 아버지는 그 비석 쪽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었어.
비석은 뒷산 중턱, 작은 배수길 옆에 있었는데 반쯤 쓰러져 있었고 글자는 거의 사라져 있었어. 다만 비석 앞에 쌓인 흙이 유난히 고르게 다져져 있었는데, 누가 일부러 쓸어놓은 것처럼 정돈돼 있더라. 아버지는 “저기 건드리지 마”라고 짧게 말하고는 담담하게 다른 길로 돌아갔어. 나는 “뭐가 그렇게 무섭게요?” 하고 물었지만, 아버지는 대답 대신 손바닥으로 비석을 가리키는 대신, 산등성이 쪽만 한번 더 훑어봤지.
그날 저녁, 집 마당에서 빗물이 고이는 걸 확인하다가 나는 다시 산 쪽이 생각났어. 비석이 있던 자리에서 끌려온 듯한 냄새가 났거든. 젖은 흙 냄새랑 비슷한데, 더 차갑고, 오래된 종이 젖은 냄새 같은 느낌이었어. 그런데 이상한 건 냄새가 특정한 바람 방향에서만 잠깐씩 올라왔다는 거야. 마당 한가운데 서면 괜찮다가, 비석 있던 쪽으로 고개만 돌리면 “아, 여기서 올라오네” 싶을 정도로 확 들어왔어.
며칠 뒤, 친척 어른이 내려와서 제사를 준비하느라 집에 들렀는데, 우연히 뒷산 얘기가 나왔어. 그분이 “그 비석, 아직도 거기 있냐” 하길래 우리도 모르게 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냈지. “그거 그냥 오래된 건데… 글도 다 지워져서.” 친척 어른은 말끝을 흐리다가, 조용히 “그게 오래됐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라고 했어. 그리고는 술잔을 내려놓고, 비석이 보이는 방향으로 시선을 두었는데, 그 표정이 정말 오랜 기억을 끄집어내는 사람 같았어.
그날 밤, 나는 잠을 제대로 못 잤어. 자꾸 귀 옆에서 아주 미세하게 긁히는 소리가 들렸거든. 창문 닫아도 들리고, 베개를 돌려도 계속 같은 높이로 들려서, 결국 새벽에 일어나 조용히 집안을 돌아봤어. 그때 부엌 쪽에서 종이 젖는 소리 같은 게 났고, 창문 밖으로는 달빛이 땅바닥에 희미하게 줄을 긋고 있었어. 이상하게도 그 빛이 뒷산 방향, 비석이 있던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보였어.
문득 생각이 들었어. 내가 어릴 때도 가끔 뒷산에서 “쿵, 쿵” 같은 소리가 들린다고 했던 게 기억났거든. 그땐 어른들이 “너무 놀라지 마, 산짐승이 그러는 거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소리가 짧게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하는 패턴이었어. 마치 누군가 돌을 밀었다가 멈추고, 또 밀었다가 확인하는 것처럼. 나는 그 패턴을 떠올리자마자, 비석 앞의 흙이 정돈돼 있던 게 더 선명하게 보이더라. 누군가 “다음”을 준비해두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며칠 뒤, 내가 혼자 산길로 잠깐 올라가 봤어. 아버지 말 들으면 안 되는 거 알았는데, 솔직히 호기심이 더 컸어. 덤불을 헤치고 비석이 있던 자리에 다가가자, 쓰러진 돌 틈에서 아주 얇은 실 같은 게 나와 있었어. 손톱만 한 크기인데, 바람이 불 때마다 미세하게 움직였고, 가까이 가면 종이처럼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어. 나는 손으로 잡지 않고 그냥 바라보기만 했는데, 그 순간 비석 위에 남아있던 글자 한 조각이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선’ 같은 형태로 보였어. 글자라고 부르긴 애매했는데, 분명히 누군가가 일부러 남겨둔 것 같은 모양이었지.
돌아오는 길에 바닥이 이상하게 미끄러웠어. 젖은 흙이 아니라, 마치 물기가 얇게 깔린 유리면 같은 느낌. 발을 옮길 때마다 “사각” 하는 소리가 났고, 뒤를 돌아보면 내 발자국이 길게 늘어져 보였어. 실제로는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는데, 이상하게도 계속 같은 지점을 되밟는 느낌이 들더라. 결국 집에 도착했을 때 손목이 뻐근해서 깜짝 놀랐어. 아무것도 한 것 같지 않은데도, 마치 누가 잡아당긴 뒤 놓아준 것처럼 손목이 빨갛게 남아 있더라고.
그 뒤로 이상한 일이 더 이어졌어. 집안 어딘가에 늘 작은 돌가루가 쌓이기 시작했는데, 특히 밤에만 늘어났어. 주방 바닥, 마루 틈, 심지어 신발장 안쪽까지. 아버지는 그걸 보고 더는 산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제사 준비 때도 뒷산 비석 쪽을 피해서 동선을 잡았어. 친척 어른이 했던 말이 자꾸 떠올랐지. “그게 오래됐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그 말이 단순한 미신 같지 않게 느껴진 게, 내 기억 속 행동들이 이상하게도 비석이 있던 방향과 겹치더라고.
마지막으로, 오늘도 가끔 새벽에 잠에서 깨면 뒷산 쪽에서 아주 낮은 긁는 소리가 들려. 그 소리는 멀리서 들리는데도, 이상하게도 내 방 창문 바로 옆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느껴져. 나는 더 이상 올라가 보지 않기로 했어. 다만 비석이 있던 자리의 흙이 매번 조금씩만 달라지는 걸, 풀 사이로 보이는 흔들림으로 확인할 때마다 마음이 쿵 내려앉아. 누군가는 아직도 거길 “정리”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반대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쪽이 우리 집을 정리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