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주차장 기둥에 누가 손바닥만 한 원을 그려놨어
지하주차장 기둥에 누가 손바닥만 한 원을 그려놨어. 처음엔 그냥 낙서겠지 싶었는데, 그날 이후로 그 원이 자꾸 시야에 걸리면서 괜히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더라. 우리 아파트 지하 2층, 주차장 출입문 닫히는 소리랑 형광등 깜빡임 사이로 그 원이 딱 보였어.
나는 퇴근하고 들어와서 차를 빼려는데, 평소랑 동선이 비슷하잖아. 그런데 그날은 왠지 걸음이 느려졌어. 기둥 모서리에 손바닥만 한 원이 그려져 있었거든. 연필로 그린 것처럼 흐릿한데, 이상하게 선이 일정하고 지저분하진 않았어. 누가 장난으로 그려놨다기엔 너무 “정확”했달까.
원 안쪽은 완전 하얀 바탕이 아니라, 누가 지우지 못하고 남긴 듯한 회색 흔적이 얇게 남아 있었어. 그걸 보면 누가 여러 번 덧그린 느낌도 들었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휴대폰 플래시로 한 번 비춰봤는데, 페인트처럼 번진 게 아니라 벽에 살짝 스며든 자국 같더라. 지하주차장은 습기 때문에 웬만한 건 쉽게 닦여야 하는데, 그건 닦여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어.
다음 날도 출근하면서 똑같이 봤어. 전날 밤엔 분명히 있었는데, 아침에 다시 확인하니까 원이 더 선명해져 있었어. “습기 때문에 선명해진 건가?” 같은 생각을 잠깐 했는데, 그건 말이 안 되잖아. 형광등 각도만 바뀌면 보이는 정도가 달라질 수는 있어도, 새로 생긴 것처럼 선이 굳어가는 느낌이 들었거든. 그리고 그 원이 있는 기둥 주변만 유독 차가운 공기가 훅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어.
처음에는 내 눈이 피곤해서 그러는 건가 싶어서, 혼자 또 다른 기둥들을 체크했어. 다른 기둥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유독 그 기둥만 “표식”처럼 보였어. 사람은 원래 익숙한 자리에서 안정감을 느끼는데, 그날부터는 그 자리로 시선이 먼저 갔어. 차를 세우고도 핸들 잡기 전에 멍하니 기둥을 보게 되더라. 솔직히 말하면, 무서워서 피하고 싶었는데 더 잘 보였어.
며칠 지나서 관리실에 말했어. “지하주차장 기둥에 원이 그려져 있는데요, 혹시 페인트칠 같은 걸 한 거 아닌가 싶어서요.” 이렇게 말하니까 관리실 아주머니가 잠깐 멈칫하더니, “그거요? 우리도 봤어요.”라고 했어. 그 말이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어. 그리고 아주머니는 “그게 처음엔 한 개였는데, 어느 날부터 자꾸 늘더라”고 덧붙였지. 나는 그때서야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어.
그날 이후로, 같은 층 다른 기둥에도 비슷한 원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어. 크기나 위치는 다 달랐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 원이 생긴 기둥들은 공통적으로 주차장에서 사람들이 자주 지나가는 길목이었고, 그 주변에서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지는 것 같았어. 이상하게도 누가 그 원을 보면 바로 옆을 보지 않고, 원을 먼저 확인하고 지나가더라고. 우리끼리 “낙서 생겼다”는 식으로 웃으며 얘기하면서도, 웃는 표정이 자꾸 어색해졌어.
어느 저녁엔 비가 많이 왔는데, 지하주차장 물기 때문에 냄새가 올라오잖아. 그런데 그 원이 있는 기둥 앞에 서면, 물비린내랑 섞여서 뭔가 더 묘한 냄새가 났어. 금방 지나가지만, 그 짧은 시간에 정신이 툭 끊기는 느낌이 들더라. 그래서 나는 그 기둥 앞에서는 폰 화면도 제대로 못 봤어. 눈이 자꾸 원으로 돌아가서, 마치 시선이 끌리는 것처럼 느껴졌거든.
마지막으로 확실히 겁이 난 건, 내가 늦게 들어온 날이었어. 승강기에서 내리는데 지하 통로가 조용했고, 평소엔 들리던 차 문 소리도 없었어. 나는 차를 뽑으려고 가장 가까운 기둥을 지나가는데, 그 원이 원래 있던 곳보다 약간 아래에 또 선명하게 보였어. 분명 새로 그린 것 같은데, 누가 그린 걸 내가 어떻게 봤겠어. 그 순간 머릿속에 “혹시 누가 계속 같은 위치를… 표시하듯 확인하는 거 아닐까” 같은 생각이 스쳤어.
그날 밤, 나는 일부러 다른 길로 걸어서 올라갔고, 다음 날 아침엔 관리실이 이미 그 원들을 지우고 있었다는 걸 봤어. 그런데 지워진 자리에 이상한 빈 느낌이 남아 있더라. 마치 벽이 그 자리를 기억하는 것처럼, 하얗게 닦인 부분이 오히려 더 눈에 들어왔어. 그리고 지금도 가끔 지하주차장에 내려가면, 눈앞에 원이 없는데도 어디쯤 있을지 본능처럼 찍히는 게 있어. 그 원이 사라져도, 그 원을 보는 내 태도만은 남아버린 느낌이 들어서, 결국 난 그 기둥을 더 이상 정면으로 보지 않게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