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거래로 받은 책갈피에 손글씨가 남아 있더라
중고거래로 받은 책갈피에 손글씨가 남아 있더라. 솔직히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택배 상자에서 책갈피가 먼저 보이면서부터 기분이 이상해졌다. 판매자가 “책 상태 괜찮아요, 같이 드려요”라고 적어둔 게 들어 있었는데, 봉투 안쪽에 얇은 종이 책갈피가 끼워져 있었고 그 위에 분명 글씨가 보였다.
책갈피는 하얀 종이였는데 모서리가 조금 누렇게 변해 있었고, 가운데에 손글씨가 한 줄 적혀 있었다. 프린트가 아니라 연필이나 볼펜으로 천천히 쓴 느낌. 글씨는 또박또박했는데 이상하게도 내 이름이 아니었고, 어떤 날짜랑 장소가 같이 적혀 있었다. “OO서점 3층, 7시, 다음 권까지” 같은 식으로, 정확히는 기억이 나진 않지만 방향을 알려주는 문장 구조였다.
처음엔 그냥 누가 쓰다 만 메모인가 싶었다. 책갈피를 만든 사람이 자기만의 습관으로 남겨둔 흔적일 수도 있으니까. 근데 문제는 책에 끼워진 위치였다. 내가 산 책은 소설이었고, 책갈피가 들어가 있던 페이지가 정확히 내가 펼쳐서 읽고 있던 장면이랑 맞물렸다. 페이지가 맞는다는 게, 그냥 우연이라고 하기엔 묘하게 티가 났다.
책갈피를 꺼내서 글씨를 더 자세히 보려는 순간, 종이 아래쪽에 아주 작게 다른 글자도 보였다. “읽고 나면 다시 넣어둬”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 문장이 누가 봐도 부탁처럼 느껴졌다. 부탁인지, 아니면 지시인지 애매했는데… 그 문장 톤이 이상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났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잠깐 손이 멈췄다.
판매자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가도, 괜히 민폐일 것 같아서 그냥 책을 계속 읽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책갈피가 가리키는 페이지마다 글이 더 잘 들어오는 것 같았다. 물론 책 자체가 잘 쓴 작품이기도 했지만, 마치 누군가가 읽는 흐름을 조절해 둔 것처럼 장면 전개가 ‘그때 그 자리’에서만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나는 또 중고거래 기록을 뒤져봤다. 판매자 프로필 사진은 평범한 풍경이었고, 글도 많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같은 책을 ‘이전에도’ 올렸던 흔적이 보였다. 날짜가 꽤 있었고, 거래 완료 댓글에 “사람이 남긴 것 같은 게 같이 왔어요” 같은 문장이 보였다. 누가 먼저 비슷하게 느꼈다는 말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싶으면서도, 동시에 더 찝찝해졌다.
그래서 이번엔 조심스럽게 판매자에게 물어봤다. “혹시 책갈피에 적힌 손글씨가 원래 들어 있던 건가요?”라고만 보냈는데,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그건 제가 넣은 게 아니고요. 원래 있던 것 같아요. 이상하죠? 그냥 두셔도 돼요.”라는 말이 전부였다. ‘두셔도 돼요’라는 표현이 자꾸 머릿속에 남아서, 마치 내가 뭔가를 건드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책갈피를 책에서 빼서 책상 서랍에 넣었는데도 자꾸 떠올랐다. 손글씨의 방향이 지금의 내 행동을 따라오는 것 같아서, 잠깐씩 눈이 떠졌다. 괜히 검색을 해봤는데, OO서점 3층이라는 단서가 오래된 지점명이라서 쉽게 안 나왔다. 그런데 희미하게, 예전에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누가 책을 넘기고 있었다”는 식의 글을 남긴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그 글이랑 감정 결이 같았다.
며칠 뒤 나는 결국 결심해서, 책갈피를 다시 원래 그 책의 같은 위치에 끼워 넣었다. 이번엔 아무 생각 없이 넣었는데도, 종이가 책장 사이로 스며들 때 뭔가 ‘딱’ 걸리는 느낌이 났다. 글씨가 보이는 방향도 어쩐지 정확히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한 번 더 들춰보니, 책갈피 아래쪽에 없던 아주 옅은 자국이 생겨 있었다. 새로 쓴 건 아닌데, 마치 누가 연필로 덧댄 것처럼 선이 더 진해져 있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다음 사람은 미리 찾지 말고, 읽는 동안만 기다려” 같은 말이었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중고거래는 물건을 주고받는 행위인데, 그 종이 하나가 누군가의 기다림을 같이 건네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 이후로 책을 펼칠 때마다, 나는 꼭 마지막 장까지 넘기기 전에 잠깐 숨을 죽이게 된다. 혹시… 다음 책장 넘어갈 때까지도, 누군가가 정말로 ‘기다리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