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지워지지 않은 문장이 남아
회사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지워지지 않은 문장이 남아 있었던 날, 나는 그게 그냥 누군가 실수로 닦지 못한 흔적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문제는 그 문장이 매번 똑같이 남아 있다는 거야. 하필이면 내가 그날 오전에 회의실 문을 열었을 때, 보드 전체가 깔끔하게 지워져 있었는데도 가운데만 눈에 띄는 한 줄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지. 형광펜으로 그어둔 것도 아니고, 마커도 아닌데 왜인지 글자가 지워지지 않는 느낌이 들었어.
문장 자체는 짧았어. “오늘은 지우지 마.” 딱 그 한 줄만 남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글씨가 오래된 잉크처럼 번져 있지 않고, 오히려 방금 쓴 것처럼 새까맣게 또렷했어. 나는 회의실 담당인 편이라 보통 누가 뭘 남겨두면 금방바로 닦아. 그래서 그날도 물티슈랑 스프레이를 꺼내서 문장을 문질렀는데, 이상할 정도로 잘 안 지워졌어.
처음엔 내가 힘을 덜 줬나 싶어서 조금 더 세게 닦았거든. 그런데 닦을수록 글씨가 옅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글자 주변만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 들었어. 스프레이 냄새가 확 올라오고 보드가 하얗게 될 때마다 검은 글씨가 그 위에 다시 떠오르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보드 표면이 이상하게 끈적해진 것처럼 느껴져서, 손으로 훑으면 미세하게 뭔가가 남아 있는 듯했어.
그날 회의는 계속됐고, 문장이 남아 있는 채로 사람들이 들어오기도 했어. 팀장도 잠깐 보더니 “어제 회의 자료 정리하다가 누가 덜 닦았나 보네” 하고 넘어갔지. 근데 내가 보기엔 그 문장이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아주 미세하게 위치가 달라지는 것 같았어. 누가 일부러 장난치는 건가 싶어서, 회의 끝나고 다들 나간 뒤 CCTV 확인도 했는데 회의실 앞쪽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어도 그 문장을 새로 써놓는 장면은 없었어.
이틀 뒤에는 더 황당해졌어. 내가 출근해서 보드를 확인했더니, 문장은 그대로 있었고 바로 아래에 다른 문장이 덧붙어 있었거든. “지우면 돌아온다.” 이 문장은 글자 크기가 조금 작았고,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던 것처럼 글씨가 보드에 붙어 있었어. 나는 그때부터 단순한 실수는 아니라고 확신했어. 직원들끼리 장난칠 만한 분위기 자체가 아니었고, 보드 관리도 내가 맡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닦지 않고, 대신 관리대장에 적어둔 뒤 대표님이랑 회의 끝나고 말하려고 했어. 근데 대표님이 회의실로 들어오려는 순간, 복도에서 누가 “회의실 비번 바꿨습니다”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 보안 담당이 어제부터 이상 징후가 있어서 잠금장치 조정했다고 하더라고. 솔직히 그 말 듣고 나니까, 내가 겪은 일이 단순히 보드 잉크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느낌이 확 들었어.
그날 저녁, 나는 혼자 남아서 문장을 사진으로 찍어뒀고, 보드 스프레이를 새 걸로 다시 써봤어. 이번엔 아예 장갑 끼고, 물걸레로 문장 주변까지 싹 닦았는데도, 다음 날 아침에 확인해보니 보드는 말끔했는데 가운데 문장만 또 남아 있더라. 그리고 그 문장 옆에 아주 작은 글씨로 한 줄이 추가돼 있었어. “기다려. 네가 하잖아.” 그때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어. 내가 어제도 분명히 “지우지 말아야 하나” 하고 생각하긴 했거든.
그 후로 몇 번 더 반복됐어. 내가 닦으면, 다음 날 문장이 더 또렷해져서 돌아오고, 닦지 않으면 그 아래에 문장이 하나씩 더 생겨나는 식이었지. 팀원들은 피곤한가 보다 하고 웃어넘겼는데, 이상하게도 그 문장을 누가 직접 읽거나 사진을 공유하는 순간마다 보드 글자가 더 선명해졌어. 그래서 결국 회사 내에서 회의실로 들어가면 다들 보드를 일부러 보지 않게 됐고, 누군가는 아예 “그 방엔 형광등이 꺼져 있어야 한다” 같은 소문까지 돌았어.
마지막으로 남은 문장은 가장 짧았어. “이제 시작.” 그 문장은 다른 문장처럼 잉크 번짐도 없고, 지우려 해도 손가락이 닿는 부분만 더 진해졌어. 나는 더는 장난 같다고 생각하지 않게 됐고, 그날 회의실을 나서면서도 뒤돌아보지 않으려 했는데, 문을 닫는 찰나에 보드 너머에서 아주 희미한 형광빛 같은 게 보였어. 불빛이라기보단, 글씨가 숨 쉬는 것처럼 보였거든.
며칠 뒤에 누가 보드를 새로 교체했는데도, 회의실에 들어가면 가끔은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그 문장이 떠올라. 물론 누가 봐도 실물로 남아 있는 건 아니라고들 해.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 회의실 문을 열기 전에 손잡이를 한 번 더 확인하게 돼. “지우지 마”라는 말이, 그날부터 회사의 일정표보다 먼저 우리 행동을 정해버린 느낌이 들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