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간호사가 아닌 사람이 내 차트를 들고 걸어왔다
병원에서 간호사가 아닌 사람이 내 차트를 들고 걸어왔다. 처음엔 “오, 나 호출 안 했나?” 싶어서 고개만 들었는데, 그 사람이 들고 있는 건 분명 내 환자 차트였고, 손에 든 필통이나 배지 같은 것도 안 보였다. 유니폼은 입고 있었지만 간호사라기엔 너무 단정했고, 무엇보다 걸음이 너무 느긋했다. 복도 형광등 아래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외래 대기실 끝쪽에 앉아 있었고, 차트를 들고 오는 사람은 내 쪽으로 직진했다. 번호표도 확인하지 않았고,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여기.” 하고 짧게 말하면서 내 앞 테이블에 차트를 내려놓더니, 기다리라는 듯 손가락 하나로 의자 등받이를 톡 쳤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목이 서늘해졌다. 병원에서 누가 내 차트에 손대는 순간은 보통 누군가의 확인 절차가 따라야 하잖아.
그래서 나는 반사적으로 “어… 간호사분 아니세요?”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은 잠깐 웃는 듯했는데, 웃음이 아니라 굳은 얼굴이 잠깐 풀리는 느낌이었다. “저는 여기서 담당이에요.”라는 말만 하고, 내 차트를 열어 내용을 훑었다. 열람하는 속도도 빠르긴 했지만, 무슨 기록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다는 사람처럼 넘겼다. 나는 그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남는다. 종이를 넘길 때 나는 숨소리가 아니라 종이 마찰음만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묻는 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사람은 내 옆에 앉지 않고 바로 복도 쪽으로 다시 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나는 분명히 “차트 가져가실 거예요?”라고 물었어야 했는데, 그 순간 말이 입에 붙는 느낌이 들었다. 대신 손만 멍하니 차트 표지 위에 얹어버렸다. 표지를 넘기자마자 내 진료일과 증상 기록이 딱 보였고, 그 아래에 누군가의 필체로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대기실에서 확인됨’ 같은 문장이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그 메모를 보자마자 심장이 빨라졌다. 대기실에서 확인된 게 “내가 예약한 환자라서 확인됐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글의 톤은 마치 감시 카메라 화면을 누군가가 체크한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문장이 내가 본 적 없는 의료진의 서명 옆에 붙어 있다는 거였다. 담당 의사가 서명해야 할 위치에, 간호사가 아닌 사람의 필체가 섞여 있었다. 나는 차트를 덮으려 했는데, 손끝이 차가워져서 잘 안 덮혔다.
그 사람은 이미 복도 끝으로 사라진 뒤였고, 대기실 안에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사람들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 차트 위에 적힌 메모 때문에 괜히 내가 예민한 건가 싶었는데, 바로 그때 원무과 쪽에서 직원이 나오더니 “환자분, 검사실로 이동하세요.”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트를 들었다. 그런데 검사실로 가는 길에 문 옆에 붙은 안내문을 봤는데, 거기엔 내가 속한 진료과가 아니라 다른 과의 업무 시간표가 적혀 있었다. 내가 착각한 걸까 싶어서 다시 확인했는데도 똑같았다.
검사실 앞에서 나는 잠깐 멈춰 섰다. 차트에 적힌 메모와, 방금 원무과 직원이 불러준 과가 묘하게 엇갈리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그래서 간호사 호출 버튼을 눌렀고, 담당자에게 “아까 차트 들고 오신 분 누구였는지” 물어보려 했다. 그런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던 몇 초 사이, 문틈으로 보이는 간호사들의 동선이 너무 빠르게 정리되는 게 느껴졌다. 마치 누가 “정리해”라고 말한 것처럼, 방금 전까지 보이던 누군가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결국 간호사가 나와 내 신분 확인을 하고, 차트를 가져가려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차트에 메모가 있던데요. 누가…?”라고 말했지만, 간호사는 그 문장을 보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리고는 “그건 병동 쪽에서 넘어온 양식일 거예요. 그냥 진행하시면 돼요.”라고만 했다. 그 말이 너무 빠르고 단정해서 오히려 더 찜찜했다. 병동 양식이라면 간단히 설명해도 될 텐데, 왜 굳이 내 질문을 ‘그냥’으로 눌러버리는지 이해가 안 됐다.
검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다시 차트 기록을 떠올렸다. ‘대기실에서 확인됨’이라는 문장. 그리고 그 사람이 내 앞에 차트를 내려놓을 때 느긋했던 태도. 나를 부르지도 않고, 내 이름을 묻지도 않았는데, 마치 이미 내 상태를 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날 밤 집에 와서 확인한 진료예약 내역엔 내 담당 항목이 원래 예정과 미묘하게 달랐다.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종이 한 장의 미세한 틀어짐처럼 마음이 계속 걸렸다.
가장 소름은, 그 사람이 사라진 복도 끝에서 찍힌 듯한 CCTV 위치가 생각났다는 거다. 분명 그곳은 “사람이 지나가면 흔적이 남는” 자리인데, 이상하게도 그날 내 머릿속엔 그 CCTV 화면이 아니라 “이미 확인한 기록”만 남아 있었다. 혹시 누군가는 내 대기 시간까지도 확인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이미 그걸 허락한 걸까…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손바닥이 다시 차갑게 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