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에서 누가 내 컵을 씻어 말린 흔적만 남겨뒀어
원룸에서 누가 내 컵을 씻어 말린 흔적만 남겨뒀어.
사건은 별거 아닌 것처럼 시작됐어. 매일 아침 물 마시고 바로 컵을 싱크대에 갖다 놓는 편이거든. 근데 그날은 내가 분명히 설거지 안 했는데도, 다음 날 아침 내 컵이 싱크대 옆 선반에 딱 가지런히 말라 있더라. 물기 자국도 없고, 물때 끼는 습관처럼 그 특유의 뿌옇게 마른 흔적도 없었어.
처음엔 내가 전날 밤에 깜빡하고 씻어 놨나 싶어서, 설거지통이랑 수건 상태부터 확인했어. 그런데 수세미는 그대로였고, 물이 닿았다는 냄새도 애매했어. 컵만 반짝하게 닦인 느낌이었고, 바닥에는 이상하게도 아주 얇은 원형 테두리 같은 게 남아 있었어. 마치 손으로 대충 문질렀다기보다, 아주 작은 습기로 닦고 바로 말린 것처럼 보였지.
그래서 나는 일단 그냥 넘어가려 했어. 원룸은 붙박이처럼 생활하다 보면 가끔 누가 공용공간에서 물을 튀기거나, 누군가 문 닫는 소리 때문에 내가 멍하게 있는 날이 있잖아. 근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어. 그 주 내내 컵이 내가 놓는 위치랑 똑같이 돌아와. 하루만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싱크대에 “그냥 두는 날”이면 다음 날 항상 말끔하게 건조된 상태로 나타났어.
그리고 컵 안쪽 바닥에 미세하게 남은 자국이 있었는데, 그게 매번 같은 모양이더라. 나는 컵을 쓸 때 손톱으로 살짝 긁히는 부분이 생기거든. 근데 그 자국이 매번 지워져 있었어. 누군가가 내 컵을 씻었다는 건 확실한데, 내가 쓰는 방식과는 달랐어. 너무 깔끔하게 말려서, 누가 “세척”을 했다기보다 “정리”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나는 소심하게 테스트를 해봤어. 전날 밤에 컵을 싱크대에 놓고, 의도적으로 물 몇 방울을 한쪽 테두리에만 남겨놨어.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 물방울은 사라졌는데 컵의 바깥쪽만 말라 있었어. 안쪽 면은 아주 미세하게 습기가 남아 있었고, 그마저도 손으로 닦은 흔적이라기보단 바람에 마른 느낌이었어. 그러니까 누군가는 컵을 “내가 쓰기 좋은 상태”로만 만들어 놓고, 완전하게 관리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지.
그때부터는 생활 자체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 현관문 쪽 손잡이, 바닥에 떨어진 먼지, 가끔씩 보이는 복도 소리 같은 것들. 나는 누가 내 방에 들어올 수 있는지 따져봤는데, 내 방은 비밀번호 자물쇠가 아니라 그냥 열쇠로 잠그는 구조였거든. 열쇠는 내가 항상 가방 안에 넣고 다녔어. 누가 훔쳐 갔다고 생각하면 너무 극단적인데, 그렇다고 내가 놓친 틈이 있었다고 보기엔 이상하게도 매번 열쇠는 그대로였어.
결정적인 건 그 주말이었어. 밤에 집에 들어와서 컵을 씻지 않고 그냥 물기 있는 채로 테이블 아래에 잠깐 숨겨놨어. “다음 날에도 똑같이 말라 있겠지?” 같은 확인이지.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컵은 테이블 아래에서 발견되지 않았어. 대신 싱크대 선반 위에, 내가 숨긴 위치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말끔하게 놓여 있었어. 그리고 컵 손잡이 쪽에 아주 얇게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그건 내 손가락 두께랑 비슷한 느낌이었어.
그날 이후로 나는 컵을 아예 쓰지 않기로 했어. 대신 일회용 컵을 사서 물을 마셨고, 씻을 일 자체를 끊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회용 컵도 며칠 뒤부터 “정리된 상태”로 남아 있더라. 비닐이 반듯하게 개봉돼 있고, 바닥에 흘린 흔적도 없고, 마치 누군가 “쓰고 난 자리”를 나 대신 정리해둔 것처럼. 그때 깨달았어. 이 사람은 컵만 집어간 게 아니라, 내 생활 흐름을 보고 있는 거구나.
지금도 가끔은 싱크대 쪽을 보면 손이 먼저 가. 원래는 컵을 확인하던 습관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오늘도 있을까”를 확인하게 됐어. 그리고 지난번엔, 내 방에선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데도 싱크대 선반 위에 아주 얇은 물기 자국이 남아 있었어.
그 자국이 마치 누군가가 떠난 뒤에도, 손끝의 온도가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 나는 그때부터, 내 컵을 씻어주는 사람이 있는 게 무섭기보다… 내 생활을 대신 맞춰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더 소름이 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