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최신글
자유/잡담 괴담 추천 0

엘리베이터에서 층수 대신 ‘방향’이 표시되는 날이 있어

2026-08-19 16:29:11 조회 49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그날은 진짜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퇴근하고 집에 가려고 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데, 평소처럼 1층부터 15층까지 숫자가 줄줄이 있는 게 아니라 표시창에 ‘방향’이 떠 있는 거야. ‘동(東)’, ‘서(西)’, ‘남(南)’, ‘북(北)’… 그리고 그 옆에 얇게 깜빡이는 작은 글씨로 “선택 후 이동” 비슷한 문구가 있었지. 처음엔 고장 난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다른 사람들도 아무렇지 않게 그걸 보고 버튼을 누르더라.

내가 제일 먼저 한 건, 당연히 관리실에 전화하려는 거였어. 근데 엘리베이터 안에 CCTV는 돌아가고 있었고, 안내 방송도 평소 톤 그대로 나왔어. “고객님, 목적지 방향을 선택해 주세요.” 이상하게도 말투가 장난스럽거나 기계적으로 들리지 않았고, 꽤 친절했거든.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나를 보더니 “아유, 또 그날이네. 숫자 대신 방향 나오는 날 있어요.” 하고는 ‘남’ 버튼을 눌렀어.

나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는데, 그 웃음이 입에서 멈췄어. 표시창이 ‘남’으로 바뀌는 순간,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느낌이 아니라 살짝 옆으로 치우치는 것처럼 ‘덜컥’ 했거든. 몸이 아니라 귀가 먼저 알아차린 느낌이랄까. 평소엔 0.5초쯤 지나서 부드럽게 움직이는데, 그날은 버튼을 누른 뒤 아주 짧은 지연이 있고 그 다음에 움직임이 따라왔어. 마치 누군가 내부에서 시간을 맞추는 것처럼.

“어디 가세요?” 하고 누가 물었는지 기억이 흐릿한데,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사람들 표정이 다들 똑같았어. 아무도 놀라지 않으려고 애쓰는 얼굴이 아니라, 그냥 익숙한 얼굴. 그게 더 소름이었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서’ 버튼을 누르고 있었고, 손가락이 눌릴 때마다 표시창이 아주 얇게 흔들리는 것 같았어. 숫자 대신 방향인데도, 내 머리는 어느 층으로 가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이 들었어.

움직임이 끝나고 문이 열릴 때, 층수는 표시되지 않았어. 대신 문이 열리면서 복도 쪽 안내등이 특정 색으로 바뀌었는데, 그게 방향마다 달랐어. ‘서’를 선택했더니 복도 조명이 희미하게 푸른 기운을 띠더라. 복도는 분명 3층쯤처럼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내 발걸음이 가볍지 않고 무게가 붙어 들어가는 느낌이었어. 마치 바닥이 사람을 한 번 더 생각하라고 기다리는 것처럼.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문은 똑같이 생긴 세대 번호가 붙어 있어야 할 텐데 번호가 없었어. 대신 문 위에 작은 방향 표식이 붙어 있었어. ‘서’라는 글자 옆에 작은 화살표가 달려 있고, 그 아래에 날짜가 적힌 것 같은 흔적도 있었는데, 자세히 보려는 순간 시야가 미세하게 흐려졌어. 내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글자가 바뀌는 것 같아서, 괜히 확인하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함이 들었거든.

그때 뒤에서 “출입구로 돌아가세요” 같은 안내가 들렸어. 그런데 방송 스피커가 엘리베이터 안이 아니라 복도 천장에 달린 것처럼 울렸어. 나는 급하게 돌아가려고 발을 돌렸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는데도 엘리베이터 문은 열리지 않더라. 복도 끝에는 분명 엘리베이터가 있어야 하는데, 그 자리에 ‘막힌 면’이 생긴 느낌이었어. 벽이 생겼다기보단, 공간이 접힌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느낌?

다행히도 그 순간, 반대편에서 같은 아파트 주민으로 보이는 남자가 뛰어왔어. 표정은 놀람이 아니라 ‘아, 또 그랬네’ 같은 무덤덤함. 그는 내 손목을 잡지 않고 그냥 팔을 휘둘러서 방향을 가리켰어. 그리고 “오늘은 늦게 누르면 안 돼요. 방향이 사람 마음 먹는 대로 바뀌거든.” 하는데, 말끝이 이상하게 끊겼어. 마치 문장이 끝나기 전에 누가 끼어든 것처럼.

남자가 가리킨 쪽으로 걸어가자 엘리베이터가 원래 있어야 할 위치가 아니라 옆 벽에서 나타났어. 문이 열리기까지의 시간도 이상했어. 문이 열리기 전에 금속이 문틀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귀가 아니라 머리 안쪽에서 울리는 느낌이었거든. 나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표시창을 봤어. 거기엔 내가 누른 ‘서’가 아니라, 이번엔 그냥 ‘현재’ 같은 단어가 떠 있었고, 선택 버튼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어.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순간, 내가 방금까지 걷던 복도가 뒤로 밀려나는 것처럼 느껴졌어. 그리고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조차 감이 안 왔어. 대신 귀가 다시 맞춰지는 순간, 내 집 앞 복도 조명이 원래대로 돌아오더라. 그날 이후로 나는 숫자만 보이던 엘리베이터 화면이 떠오를 때마다 습관처럼 눈을 위로 올려보게 됐어. 혹시 내일도… 아니, 어떤 날은 ‘층’이 아니라 ‘방향’이 먼저 사람을 데리고 다닌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왜인지, 그 표시가 바뀌는 걸 누가 먼저 알아차리는지조차 기억이 잘 안 나더라…

이 글 반응 남기기
추천과 비추천은 회원당 1회만 가능하며, 다시 누르면 취소됩니다.
추천 0 · 비추천 0
글 신고 안내
같은 회원은 같은 글이나 댓글을 1회만 신고할 수 있으며, 누적 신고가 5회 이상이면 자동으로 숨김 처리됩니다.
현재 글 신고 0회

댓글

댓글 작성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