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거래로 받은 가구 조립설명서에 낯선 필체로 밑줄이 그어져
중고거래로 받은 가구 조립설명서에 낯선 필체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던 날, 솔직히 그냥 ‘꼼꼼하네’ 정도로 넘겼다. 그런데 그게 시작이었지. 택배 상자 열고 나서 조립설명서 펼치는 순간, 잉크 냄새가 이상하게 새어 나왔고 밑줄이 그어진 문장들이 유난히 선명했다. 나는 그 문장들이 왜 굳이 그렇게까지 강조돼야 했는지, 그때는 몰랐다.
설명서는 일반적인 종이였는데, 본문 곳곳에 검은색이 아니라 누런 빛 도는 펜으로 줄이 그어져 있었다. 몇 군데는 글자 사이까지 살짝 스치듯 덧그려져 있었고, 문장 끝마다 조그만 점이 찍혀 있었다. ‘A를 먼저 끼우지 말 것’, ‘나사 길이 확인’, ‘이 부분에서 멈추지 말 것’ 같은 식으로, 조립하는 사람이 자주 실수하는 포인트처럼 보이긴 했다. 그래서 나는 별 생각 없이 밑줄 따라 하려다가, 이상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첫 눈에 띈 건 날짜였다. 설명서 맨 뒤쪽에 구석이 접혀 있었는데, 그 접힌 자리에서 아주 희미하게 한 줄이 더 보였다. “다음엔 혼자 오지 마.”라고 적혀 있었고, 아래에는 특정 시간처럼 보이는 숫자 두 자리와 ‘문 앞’ 같은 표현이 붙어 있었다. 솔직히 귀신 같은 말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문장이었다. 중고거래로 산 가구에 왜 저런 문구가 적혀 있을까 싶어서, 판매자에게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번호가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
조립을 하려면 결국 그 설명서를 써야 했다. 나는 밑줄이 그어진 문장들을 체크하며 부품을 꺼냈다. 그런데 부품 봉투가 생각보다 깔끔했다. 누군가 이미 조립을 끝낸 것 치고는 먼지도 거의 없고, 나사들도 종류별로 분리돼 있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봉투 바깥면에 얇은 테이프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그 테이프가 뜯겼다 다시 붙인 흔적처럼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조립을 시작했다가, 중간에 멈췄다가, 다시 시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설명서에는 “순서대로 진행”이라고 되어 있는데, 밑줄은 특정 단계에서만 진하게 그어져 있었다. 특히 “서랍 레일은 반대 방향으로 끼워도 들어간다”는 문장 위에 굵은 밑줄이 칠해져 있었다. 처음엔 장난인가 싶었는데, 실제로 레일을 들이대면 약간은 맞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손으로 밀어 넣는 순간, 철컥— 하고 소리가 날 뻔했다. 정확히는 소리가 나기 직전에서 멈췄다. 그때 손끝이 이상하게 차가워졌고, 팔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냥 내 착각이겠지 하고 다시 방향을 바로잡았고, 다행히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더 찝찝했다. 밑줄이 그어진 문장들 사이사이에 짧은 메모가 끼어 있었는데, 글씨체가 아예 달랐다. 같은 펜이라도 필압이 다르고 획이 다른 느낌. 예를 들면 “열쇠는 여기”라고 적힌 곳이 있었고, 그 아래에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근데 내 가구에는 열쇠가 들어 있지 않았다. 설명서에 따르면 잠금장치는 따로 구매해야 하는 옵션이었는데, 판매자는 “구성품 그대로”라고 했었다. 나는 일단 옵션 부품이 누락된 건가 싶어서 확인하려고 하다가, 그 메모가 붙은 종이 가장자리 쪽이 살짝 부풀어 오른 걸 봤다.
부풀어 오른 가장자리를 조심히 떼어보려 했는데, 붙어 있는 게 종이가 아니라 더 얇은 무언가 같았다. 손톱으로 긁자마자 ‘슥’ 소리와 함께 얇은 종이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그 조각에는 아주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미 한 번 해봤다면, 멈추는 법을 알아.” 그 문장을 본 순간, 설명서 밑줄이 그냥 조립 팁이 아니라 누군가의 ‘회피’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이 가구를 조립하다가 뭔가를 마주했고, 그 뒤로는 다른 사람에게 같은 실수를 하게 두지 않으려 한 건지, 아니면 반대로 누군가를 부르려는 건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래도 가구는 결국 완성해야 했다. 나는 설명서의 밑줄을 거의 무시하고, 정석대로 순서를 맞춰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번 막히는 순간이 밑줄이 굵게 그어진 지점에서만 생겼다. 나사가 안 들어가서 힘을 주려 하면, 손이 잠깐 멈칫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여기서 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욕도 했고, ‘이거 정말 내가 오버하는 거다’라고 계속 되뇌었다. 하지만 완성 단계 직전, 서랍 손잡이를 달아야 하는 구멍이 하나 더 있었다. 부품 도면에는 없는 구멍이었다.
그 구멍을 보고 한동안 손을 못 뗐다. 밑줄이 그어진 문장 중 “여분의 구멍은 쓰지 말 것”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그냥 오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 그 구멍은 형태가 깔끔했고, 주변 마감도 이미 다듬어진 상태였다. 누군가는 분명히 이미 그 구멍을 써봤거나, 누군가가 일부러 남겨둔 흔적 같았다. 나는 마지막 손잡이를 달고도 한참 동안 가구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제야, 설명서 첫 장에 아주 얇게 남아 있던 낙인을 발견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주지 마.”라는 문장이었는데, 잉크가 닳아 거의 지워져 있어서 조명 각도를 바꿔서 겨우 보였다.
가구를 쓰기 시작한 뒤로도 이상한 일은 계속됐다. 밤에 서랍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 늦게 들리는 날이 있었고, 평소엔 잘 안 울리던 바닥이 어떤 날엔 ‘툭’ 하고 먼저 응답하듯 소리를 냈다. 중고거래는 결국 사람 손을 한 번 거친 물건을 사는 건데, 그 설명서 속 밑줄은 그냥 조립 흔적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이 남아 있는 표시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는 설명서를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보관했다. 언젠가 누가 다시 묻는 날이 오면, 그때는 밑줄이 가리키는 문장을 반대로 읽어보려 한다. 왜냐하면… 지금도 나는 조립 끝나기 직전에 들었던 그 ‘멈칫’이, 내 손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이 내 손을 잡아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