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거래로 받은 전자책 리더에서 내가 읽지 않은 페이지가 저장돼
중고거래로 받은 전자책 리더에서 내가 읽지 않은 페이지가 저장돼. 솔직히 이 말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됐는데, 오늘도 그 화면을 떠올리면 손끝이 좀 서늘해져서요. 처음엔 그냥 기기 버그겠지, 전 주인이 대충 넘겨보다가 저장만 안 했나보다 하고 넘겼거든요. 근데 그게 ‘우연’으로 보기엔 너무 정확했어요.
일단 상황부터 말할게요. 나는 지하철역 근처 중고 앱에서 전자책 리더를 샀어요. 상태는 깨끗했고, 케이스도 같이 왔고, 충전 케이블도 정상이라고 하더라고요. 가격도 괜찮아서 바로 결제했고, 집에 가져오자마자 전원을 켰습니다. 첫 화면은 전자책 목록이 쭉 뜨는데, 내가 구매할 때 설명받은 건 없는 책들이 섞여 있었어요.
그래서 찝찝하지만 일단 내가 읽을 책을 새로 넣었죠. 파일을 넣고 몇 페이지 넘기면 자동으로 ‘마지막으로 읽은 위치’ 같은 게 저장되잖아요. 저는 그런 기능을 잘 쓰는 편이라, 읽다가 중단하면 다음에 이어보려고 합니다. 근데 어느 날, 내가 분명히 읽지 않은 페이지로 ‘이어보기’가 걸려 있는 걸 발견했어요. 내용은 이미 중간까지 읽던 부분이랑 완전히 달랐고, 책 자체가 아예 낯선 구성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처음엔 내 실수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다른 책을 눌렀나, 혹은 파일을 넣는 과정에서 잘못된 게 들어갔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전자책 리더에 있는 모든 책을 지웠어요. 목록도 싹 비우고, 다시 새 책 한 권만 넣었습니다. 이번엔 정말 의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었어요. 저장되는 위치도 계속 확인했고, ‘내가 읽은 흐름’이 그대로 반영되는지 체크하면서요.
근데 읽고 있던 날 밤, 잠깐 다른 방에 갔다 와서 화면을 보니까, 마지막 읽기 위치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내가 방금 읽던 챕터에서 몇 페이지 더 넘어가 있지 않은 상태였는데, 중간에 끊긴 문장 다음 장이 그대로 떠 있었어요. 더 이상한 건 그 페이지 내용이 아주 정확하게, 내가 그날 읽고 있던 챕터의 문장과 이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마치 누가 내가 읽지 않은 장을 강제로 선택해 둔 것처럼요.
저는 사실 그때부터 기기 문제라고 믿고 싶었어요. 그래서 설정을 전부 뒤졌습니다. 자동 저장, 이어보기, 최근 항목… 보이는 옵션은 다 꺼봤어요. 그리고 전자책 리더를 완전히 초기화도 해봤죠. 목록이 다시 뜰 때는 그럴듯했어요. 딱 내가 넣은 책만 있었고, 마지막 읽기 위치도 내가 멈춘 지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며칠 뒤, 똑같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단순히 ‘몇 페이지 이동’ 수준이 아니라, 제가 절대 지나간 적 없는 문단으로요.
이쯤 되면 솔직히 무섭죠. 그래서 저는 확인을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책에서 특정 문장만 스크린샷으로 찍어두고, 그 다음 날 이어보기를 눌렀을 때 동일한 문장이 나오는지 봤어요. 결과는… 스크린샷 속 문장은 없고 전혀 다른 문장에서 시작되더라고요. 더 소름은, 그 다른 문장이 특정 표현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이에요. 평범한 소설이면 그럴 수도 있는데, 대사가 아니라 독자 안내문 같은 형식이었어요. 마치 누군가가 “이렇게 읽어라”라고 적어둔 것처럼요. 물론 내가 그 문장을 스스로 넘겨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한 가지를 떠올렸어요. 처음 중고로 받았을 때, 설명에 없던 책들이 목록에 섞여 있었잖아요. 그때는 그냥 ‘전 주인이 남겨둔 파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그게 단순한 잔여 파일이 아니라 기기 안의 저장 데이터였던 걸까요. 전자책 리더는 단순히 파일만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읽기 위치나 북마크 같은 정보를 별도로 남기기도 하니까요. 근데 그 정보가 내가 누르지 않았는데도 바뀌는 건… 납득이 잘 안 됐습니다.
오늘도 그 리더를 켜면, 책 목록이 “정상적”으로 보일 때가 있어요.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척하다가, 내가 한 번만 화면을 터치하고 나면 어느 순간, 이전에 내가 본 적 없는 페이지가 저장돼 있어요. 나는 그걸 지울 때마다 또 다른 형태로 남아 있는 걸 느껴요. 삭제, 초기화, 설정 변경… 뭘 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요. 어쩌면 내가 읽는 건 책이 아니라, 누군가가 남겨둔 ‘기억의 위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하고 싶어요. 그 전자책 리더를 충전기에 꽂아두면 다음날 이어보기 위치가 바뀌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충전선을 빼고 하루 종일 전원을 꺼둔 상태였는데도 바뀌어 있었어요. 그래서 결론은 딱 하나예요. 이건 기기 시간이 망가진 게 아니라, 누군가가 “다시 열어봐”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저장을 건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화면 속 페이지가 바뀔 때마다, 마음속에서도 똑같이 어떤 장면이 이어져 버리는 기분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