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로비 정수기에서 내가 마시기 전에 먼저 컵이 차 있었어
회사 로비 정수기에서 내가 마시기 전에 먼저 컵이 차 있었어.
그날도 평소처럼 늦게까지 야근하고, 에스컬레이터 타고 내려오는데 로비가 유난히 조용했어. 퇴근 시간 끝나고 나면 보통 안내 데스크 쪽만 불이 남아있는데, 그날은 정수기 있는 자리만 유독 환하게 켜져 있더라. 나는 물 한 잔만 하고 올라갈 생각이었고, 정수기 앞에 서자마자 자동으로 컵이 떠 있는 느낌이 들었어.
정수기는 바닥에 컵이 담겨 있는 방식이 아니라, 위쪽에서 컵을 내려주고 손만 대면 바로 따라지게 되어 있어. 그래서 내가 컵을 꺼내는 건 늘 같은 동작이었거든.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내가 손을 뻗기 전에 이미 컵이 반쯤 차 있었어. 투명한 컵 벽을 타고 물이 고여 있는 게 보였는데, 내가 버튼을 누른 것도 아니고 컵이 먼저 내려와 있는 상태도 아니었어. 그냥, 컵이 거기 있었고 물이 들어있었어.
처음엔 누가 먼저 가져가려고 하다가 깜빡했나, 싶어서 컵을 들었어. 근데 컵 바닥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온도가 차가운 정도가 아니라, 막 나온 물처럼 선선하게 따뜻했어. 로비 정수기는 냉정수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날은 얼음이 섞인 듯한 차가움도 아니고, 그렇다고 뜨거운 것도 아니고… 딱 “방금 채웠다”는 느낌이었지. 내가 들자마자 컵 안에서 아주 미세하게 물결이 흔들리는 것도 보였고, 그게 더 이상했어.
나는 그냥 마시려고 했어. 어차피 회사에서 몇 번이나 마셨던 정수기고, 컵도 자동으로 내려오는 거니까 위생 문제는 크지 않겠지, 이런 생각으로. 그런데 컵을 입에 대기 직전에 버튼 쪽을 보게 됐는데, 정수기 화면에 ‘정량 완료’ 같은 글자가 잠깐 떠 있었다가 사라졌어. 그 문구가 뜨는 건 보통 누가 컵을 제대로 놓고 물이 나오는 순간이거든. 나는 그 타이밍을 본 기억이 없는데도, 화면은 분명 방금 누군가가 사용한 흔적처럼 보였어.
그래서 순간 머리가 하얘졌어. 혹시 누가 내 뒤에서 손을 대고 물을 담아놓고 간 걸까. 그런데 로비는 내가 내려올 때부터 사람 소리가 거의 없었고, 엘리베이터 앞 CCTV가 있는 쪽도 비어 있었거든. 나는 컵을 내려놓고 다시 한 번 컵을 확인했어. 컵 손잡이 쪽에 누군가가 손으로 잡았던 것 같은 미세한 물자국이 있었는데, 그게 마르기 전에 다시 젖은 듯한 모양이었어. 마치 ‘방금’ 잡았다가 다시 내려놓은 것 같은 상태.
그때, 정수기 옆의 컵 보관 칸 아래를 보니까 종이처럼 얇은 무언가가 끼어 있는 게 보이더라. 자세히 보려고 몸을 숙이는 순간, 등 뒤로 “딸깍” 하는 소리가 났어. 정말 작은 클릭음이었는데, 마치 누군가가 정수기 내부에서 무언가를 잠깐 작동시킨 것처럼 들렸지. 나는 바로 뒤를 봤지만,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고 안내 데스크는 꺼진 상태였어. 불빛만 남아 있어서 그림자가 조금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그림자가 정수기 쪽으로만 유난히 치우쳐 있었어.
나는 그날 물을 결국 못 마셨고, 그냥 빈 손으로 올라갔어. 그런데도 이상한 건, 나는 나중에 다시 로비를 지날 일이 있어서 정수기를 봤거든. 컵이 놓여있는 자리엔 컵이 비어 있었고, 화면도 평소처럼 대기 상태였어. 근데 그 전의 컵이 반쯤 차 있던 순간이 자꾸 떠올라. 누군가가 먼저 마시기 직전에 멈춘 느낌이 너무 생생했거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가 손을 대기 직전에만 채워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 후로도 종종 로비에서 정수기 소리를 들을 때가 있어. 물이 떨어지는 소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장 난 소리도 아닌데, 아주 가끔 컵 놓는 쪽에서 미세하게 진동이 느껴질 때가 있더라. 나는 이제 로비 정수기 앞에 서면 먼저 주변을 보고, 컵이 이미 차 있는지부터 확인해. 그리고 컵이 비어 있는 걸 확인한 다음에만 마셔. 근데 가끔, 비어 있어도 이상하게 입술이 먼저 마른 느낌이 들어. 내가 마시기 전에 누군가는 이미 끝냈다는 걸, 정수기가 너무 조용히 알려주는 것 같아서… 지금도 생각하면 손끝이 조금 차가워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