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에서 내가 바코드를 찍지 않았는데 가격이 먼저 떠
편의점에서 내가 바코드를 찍지 않았는데 가격이 먼저 떠.
그날도 별거 아닌 평일 밤이었어. 나는 라면이랑 생수 두 개, 그리고 귀찮아서 그냥 집어 든 디저트 하나를 계산대에 올려놓고 바코드 찍힐 위치만 대충 정리했지. 직원은 없고, 점포는 작은 편이라 셀프 계산대만 있는 곳이었어. 화면이 켜져 있고, “상품을 스캔하세요” 같은 문구가 떠 있어서 나는 평소처럼 스캐너를 들었어.
근데 스캐너 바코드를 가져다 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카운터 화면에서 소리가 “띵” 하고 울리더니 가격이 먼저 떠버렸어. 8,900원이라고. 나는 그 숫자가 내 손이랑 무관하게 튀어나온 걸 바로 봤거든. 순간 손을 멈췄는데, 화면은 그대로였어. 아무 조작도 안 했는데도 장바구니 항목이 하나 생기면서 “상품이 추가되었습니다” 같은 문구가 이어졌어.
나는 진짜로 당황해서 라면 봉지 바코드를 확인했어. 라면이랑 디저트 바코드가 각각 어디에 붙어 있는지, 혹시 내가 올려둔 다른 물건이 이미 누군가 스캔한 건 아닌지 생각도 했고. 하지만 내 앞에는 내가 집어 온 것들만 있고, 계산대 아래나 옆에 다른 상품은 없었어. 스캐너는 내 손에 들려 있었고, 나는 아직 단 한 번도 바코드를 스캔하지 않았어.
그래도 “혹시 결제 시스템이 전 단계에서 미리 잡았나” 싶어서, 난 다시 생수를 하나 올려두고 스캐너를 그 바코드에 대봤어. 그런데 이번에도 이상했어. 생수는 확실히 스캔했는데 화면에 뜨는 가격은 생수 가격이 아니고, 방금 떠 있던 8,900원이 그대로 유지된 채로 “추가 상품 1개”만 늘어나더라. 나는 소름이 올라오는 걸 느끼면서도 웃긴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라면 바코드를 찍어봤어.
그때부터는 더 어긋났어. 라면 스캔을 끝내자 화면에는 라면 가격이 뜨는 대신, 전혀 다른 메뉴명처럼 보이는 텍스트가 잠깐 깜빡였어. 글자가 다 안 읽힐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데, 분명 “이미 선택된 상품” 같은 느낌이었고, 장바구니 합계는 내가 스캔한 것과 맞지 않았어. 내가 손으로 계산대 위를 정리하듯 눌러보기도 했고, 취소 버튼을 찾으려 했는데 화면에는 “현재 진행 중”이라고만 뜨면서 터치가 잘 안 먹혔어.
직원이 없다고 했지만, 그때 매장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어. 누구 부르는 소리는 아니고, 그냥 걸어다니는 느낌. 나는 고개를 돌리며 “혹시 시스템 오류인가요?”라고 말하려 했는데,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작게 들렸어. 그 순간 다시 화면이 “띵” 하고 울리면서 결제 금액이 1,000원, 500원, 300원처럼 연속으로 바뀌더니, 마지막에는 내가 스캔한 물건 수와 상관없는 숫자에서 멈췄어. 그리고 아주 짧게, 누가 입력한 것처럼 “확인 완료”가 뜨더라.
나는 그제야 진짜로 계산대가 나랑 무관하게 뭔가를 진행하고 있다고 느꼈어. 그래서 스캐너를 내려놓고 잠깐 뒤로 물러섰지. 하지만 그 순간 화면이 다시 한 번 반응했어. 손을 뗀 상태인데도, 화면에 “스캔 대기” 문구가 사라지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서 결제수단 선택 화면이 떠버렸어. 나는 결제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말이야. 주변을 둘러보는데, 계산대 유리창 아래쪽에 작은 반사광이 보였어. 마치 바코드를 읽는 장치가 따로 있는 것처럼, 특정 각도에서만 표시가 생기는 느낌.
결국 나는 취소를 누르려고 했고, 화면이 순간 멈칫하더니 다시 “확인 완료”가 떠버렸어.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더 가까워지는 걸 느꼈고, 동시에 계산대 위에 올려둔 내 물건들 중 하나가 아주 살짝 흔들렸어. 내가 손을 댄 건 아니었어. 바람도 없고, 문도 닫혀 있었는데, 봉지 하나가 마치 “여기”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각도가 바뀌어 스캐너 라인 정중앙에 딱 들어가 있더라. 나는 그제야 깨달았어. 내가 아직 스캔을 안 했는데도 가격이 먼저 떴다는 건, 내 손이 아니라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알아서 진행된다는 뜻일 수 있다는 걸.
난 그 자리에서 결제를 끝내지 못하고, 그냥 매장 밖으로 뛰쳐나왔어. 결제 실패로 처리됐는지 문자는 안 왔고, 다음 날에도 내 계좌에서 빠져나간 건 없더라. 하지만 이상하게도 집에 와서 영수증 출력 기록을 확인해보려고 앱을 열었는데, “이용 내역 없음”이라고 뜨더라. 내가 분명 계산대 단계까지 넘어간 걸 봤는데 말이야. 편의점은 평범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다음에 다시 갔을 땐 그 계산대가 고장 났다며 교체돼 있었어. 그리고 지금도 가끔 생각나. 내가 바코드를 안 찍었는데 먼저 떠버린 그 숫자, 그게 누군가의 장바구니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확인’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