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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기사님이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 번호’라고 말했어

2026-09-21 08:29:10 조회 13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배달기사님이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 번호’라고 말했어

그날도 평소처럼 밤에 혼자 밥 먹고, 배달 앱에서 대충 평범한 메뉴 하나 시켰어. 주소는 원래 쓰던 대로고, 수신인 이름도 앱에 그대로 떠 있었지. 그런데 전화가 딱 한 번 울리더니, 상대 목소리가 너무 또렷하게 말했어. “문 앞에 있어요. 그 번호요.”

처음엔 내가 알림을 잘못 들은 줄 알았어. 내 이름이 아닌 건 맞았는데, ‘그 번호’라는 말이 뭐지? 혹시 오타가 났나 하고 급하게 메모를 떠올리는데, 앱에는 내 이름이 분명히 적혀 있었거든. 나는 조용히 현관 쪽으로 가서 손잡이를 잡고, “네, 누구세요?”라고 되물었어. 근데 전화 너머에서 한 박자 쉬더니 다시 똑같이 말했지. “그 번호. 현관 문 앞.”

문 앞엔 이미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부터 확인한 것처럼, 보통 배달기사들이 두고 가는 박스가 놓일 자리만 있었어. 그래도 불안해서 나는 인터폰으로 “제 이름은 ○○인데요”라고 말했어. 그러자 상대는 웃는 기색도 없이 아주 담담하게 “맞아요. 그래서 더 빨리 갖다 드려야 해요. 그 번호.”라고만 했어.

이상하다는 생각이 확 들었는데도, 손님 입장에선 보통 그렇게까지 따지기 어렵잖아. 그래서 나는 문을 열기 전에 최대한 조심해서 확인했어. 현관문 열쇠를 한 번도 돌리기 전에, 방문 앞 바닥의 그림자 방향을 봤는데 누군가가 정확히 문 정면에서 서 있는 것 같았어.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 동 건물 CCTV 사각지대까지 일부러 맞춰 선 느낌이었달까, 각도가 너무 ‘딱’ 맞았어.

결국 문을 살짝 열고, 문틈으로 박스를 받으려고 손만 빼려 했는데 그 순간 배달기사님이 내 쪽을 보지 않고도 손을 내밀었어. 마치 내가 문을 열기 전에 이미 동작을 예측한 사람처럼. 그분 손에는 내 이름이 적힌 스티커가 붙어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스티커를 딱 보는 순간에도 ‘내 이름’이 아니라 ‘번호’만 눈에 들어왔어. 숫자 네 자리만 선명했고, 글자들은 흐릿했거든.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 고개를 더 가까이 댔는데, 그때 그는 아주 짧게 “늦으면 안 돼요. 그 번호.”라고 말했어.

나는 얼어붙은 채로 박스를 받았고, 문을 다시 닫으려는데 그가 뒤돌아 서는 동작이 너무 느렸어. 보통은 “감사합니다” 한 마디라도 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는데, 그분은 한참 동안 복도 끝을 보면서 서 있었어. 그리고 마지막에 벨이 아니라, 현관문 옆에 있는 벽면 조그만 버튼을 손가락으로 한 번 톡 눌렀어. 소리는 거의 안 났는데, 방 안에서는 ‘딸깍’하고 작은 확인음이 들린 것처럼 느껴졌어.

그제야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서 앱 기록을 확인했어. 배달 완료 시간이 찍혀 있었고, 수신인 이름은 정상으로 보였어. 그런데 통화 기록에선 내게 ‘전화 건 사람’ 정보가 이상하게 떠 있더라. 배달기사 번호랑 똑같은데, 통화 목록에선 발신 지역이나 통신사가 안 잡혀 있었어. 그냥 공란처럼. 그래서 나는 배달 고객센터에 문의하려고 했는데, 앱에서 기사님 정보가 갑자기 사라져 있었어. 방금 전까지는 프로필 사진이 있었는데, 새로고침하자마자 “처리 중” 같은 화면만 남아있더라고.

밤이 더 깊어지면서 마음이 이상하게 가라앉았어. ‘그 번호’라는 말이 단순히 주소를 잘못 불렀다는 뜻이면, 굳이 내 이름을 지우듯이 말할 이유가 없잖아. 나는 문 앞 매트의 모서리, CCTV 방향, 그리고 인터폰 각도를 다시 떠올렸고, 이상하게도 그 배달기사님이 내가 열기 전에 문틈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는 생각이 계속 이어졌어. 나는 포장을 뜯어도 맛이 잘 안 느껴졌고, 대충 남겨두고 인터넷을 켜서 내 계정의 개인정보 표시 설정을 확인했어. 이름은 그대로였는데, 이상하게 ‘수신용 식별값’ 같은 항목이 따로 있더라. 앱에서 자동으로 붙는 그 숫자였어.

가끔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그냥 착오겠지”라고 넘기더라. 나도 처음엔 그랬고, 그래서 더 늦게 알아차렸을지도 몰라. 근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그분이 내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대신 마치 누군가가 나를 호명하는 것처럼 정확히 “그 번호”라고만 말했어. 그 말이 지금도 가끔 떠올라서, 배달이 도착할 때마다 현관 앞에 나도 모르게 귀를 세우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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