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복사실에서 서류 한 장이 계속 출력돼 멈추질 않았어
회사 복사실에서 서류 한 장이 계속 출력돼 멈추질 않았어. 처음엔 잉크가 부족해서 멈추는 고장인가 했는데, 반대로 종이는 계속 나왔고, A4 한 장이 어느 순간부터는 숫자처럼 반복되더라. 소리도 일정했어. ‘찍-찍-찍’ 하면서 동일한 문장 줄이 그대로 쌓이는 느낌이었지.
그날 나는 야근 정리하면서 문서 출력만 몇 건 맡아놨거든. 7시쯤 복사실에서 누가 한 번에 여러 장을 뽑았고, 내가 나갈 때쯤엔 이미 다 된 줄 알았어. 그런데 8시쯤 다시 복사실을 지나는데, 기계가 혼자서 일을 계속하고 있더라. 분명 아무도 없었고, 버튼 조작음도 없었어. 그냥 종이가 스스로 넘어가는 소리만 계속 났어.
처음엔 그냥 용지가 걸린 줄 알았어. 복사실 문 열자마자 진짜로 “걸림 해제” 같은 오류 표시가 깜빡였거든. 그런데 이상하게도 ‘용지 걸림’ 해결을 하라는 메뉴가 뜬 채로도 출력은 멈추지 않았어. 나는 옆에서 덜컥덜컥 한 장씩 꺼내려고 했는데, 손끝에 닿는 종이가 너무 차갑고, 무엇보다 방금 전까지 출력되던 그 장이 그대로 한 장씩 늘어나는 게 보였어.
문서를 확인해보니 내용이 계속 똑같았어. 제목도, 날짜도, 결재란 위치도 전부 동일했는데, 이상한 건 날짜만 미세하게 달라지는 거야. 같은 문서인데 매번 하루씩 앞으로 넘어가는 느낌. 예를 들면 6월 12일이 찍혀 있다가, 다음 장에는 6월 13일로 되어 있고, 그 다음은 6월 14일로. 누군가 출력 파일을 바꾼 것 같진 않았는데 종이만 그렇게 바뀌어 나왔어.
그래서 나는 급하게 프린터 전원을 껐지. 옆면에 전원 버튼이 있어서 길게 누르면 꺼지는 타입이었거든. 그런데 버튼을 누르는 순간, 기계가 ‘드르륵’ 하고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어. 전원이 완전히 꺼졌다고 생각했는데, 잠깐의 암흑 사이로 또 출력이 시작되더라. 마치 누군가 다른 쪽에서 다시 시작을 눌러주는 것처럼.
그때 복사실 내부에 CCTV가 있다는 걸 떠올렸어. 회사 내부 CCTV는 보통 서버가 따로 있어서, 누가 복사실을 건드렸는지 확인 가능하잖아. 나는 관리 PC가 있는 사무실로 가서 로그를 찾아봤는데, 문제는 “복사실 기기 조작” 같은 이벤트 기록이 아예 없다는 거야. 출력만 기록돼 있고, 정작 시작을 누른 사용자가 없었어. 분명 버튼을 누를 사람이 없는데 계속 뽑히고 있었던 거지.
나는 다시 복사실로 돌아가서 종이가 멈추는지 확인했어. 그런데 출력이 멈추지 않는 이유가 이상하게 느껴지더라. 종이가 나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거야. 처음엔 분당 몇 장 수준인데, 어느 순간부터는 손으로 잡으려 해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쏟아져 나왔어. 그래서 문서함을 막으려고 했더니, 복사기 안쪽에서 종이가 스르륵 하고 더 깊이 밀려 들어갔고, 그 사이로 하얀 종이 더미가 천천히 벽처럼 쌓여갔어.
그때 그 종이 한 장의 하단을 유심히 봤는데, 아주 작게 회사 양식 문구 옆에 “긴급 재출력” 같은 표시가 있었어. 평소에 우리가 쓰는 문서 양식엔 없는 문구였거든. 그리고 그 문구가 출력될 때마다 글자가 또렷해지는 느낌이랄까, 마치 확인하라고 계속 강조되는 것처럼 보였어. 나는 급하게 복사기 내부 용지함을 열어봤는데, 놀랍게도 이미 용지가 꽉 차 있는 상태였어. 그런데 내가 끄기 전까지는 용지가 그렇게 많지 않았거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지막으로 ‘네트워크 해제’ 버튼을 누르는 거였어. 복사기는 회사 내부망에 연결돼 있어서, 네트워크를 끊으면 출력이 멈추는 경우가 있더라. 그래서 케이블을 뽑는 대신 설정에서 연결만 끊었는데, 그 순간 종이가 딱 한 장만 더 나오고 멈췄어. 그 마지막 장엔 날짜가 오늘 날짜로 찍혀 있었고, 결재란 칸이 이상하게도 비어 있었어. 누가 결재를 해야 하는데, 문서가 마치 ‘완성’되지 못한 채로 멈춘 느낌이랄까.
나는 그날 바로 복사실 전원을 오래 끄고, 다음날 관리팀에 말했는데 “그런 장비는 원래 가끔 멈칫거린다”는 식으로 넘어가더라. 근데 그 이후로도 가끔 복사기 근처만 지나가면,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아. 특히 저 문구, “긴급 재출력”만은 왜인지 잊히지가 않아. 아직도 그 복사실에서 누가 서류를 다시 뽑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이미 정해진 한 장이 계속 앞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