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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계단에서 유모차 미끄러져서 내가 먼저 잡아준 썰

2026-09-24 08:14:11 조회 5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비 오는 날이었는데, 동네 계단이 유난히 미끄럽더라고요. 저는 마트에서 장 보고 내려오다가, 아래쪽에서 누가 “어어!” 하고 급하게 외치는 소리를 먼저 들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누가 넘어졌나 싶었는데, 다음 순간 정말 황당하게도 유모차가 휙 하고 옆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어요.

계단은 총 몇 층 안 되는 편이긴 한데, 그래도 경사가 있는 데다 물기 때문에 신발 바닥이 잘 달라붙지 않더라고요. 저는 이미 한두 칸 내려온 상태였고,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랑 아이 울음소리가 섞여서 더 정신이 없었어요. 유모차는 보호자 품에서 나온 것처럼 통제가 안 된 채로, 바퀴가 계단 모서리를 타면서 내려가고 있었거든요.

저는 망설일 틈이 없었어요. “저거 멈춰야 한다”는 생각만 딱 들고 몸이 먼저 움직였어요. 한 칸만 더 내려가면 거리도 애매해지고, 그렇다고 손만 뻗으면 닿을지 장담도 안 되니까, 결국 저는 계단 옆으로 중심을 옮겨서 미끄러지듯 달려 들어간 느낌으로 잡으려 했어요. 순간 머리속이 새하얘질 정도로 짧았는데, 그래도 손이 닿는 순간 확실히 잡혀서 멈출 수 있었어요.

유모차는 완전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바퀴가 한 번 크게 걸린 다음에 다시 미끄러질 준비를 하는 상태였어요. 아이는 놀랐는지 울음을 멈추지 못했고, 옆에 계시던 엄마는 이미 놀란 얼굴로 숨이 가빠 보였어요. 저는 “괜찮으세요? 아이 다친 데 없어요?”라고 연달아 물었는데, 엄마는 말이 잘 안 나오고 손으로 아이를 꼭 안고만 계셨어요. 그 표정이 아직도 기억나요.

제일 찝찝했던 건, 제가 잡는 와중에 물기랑 먼지가 묻어서 옷도 신발도 엉망이 됐다는 거예요. 그래도 그게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유모차를 다시 안전하게 세우고 바퀴 상태를 확인해 보니까, 누군가 급하게 세우려다 방향이 틀어진 것 같았어요. 엄마가 “아까 여기서만 잠깐 멈추려고 했는데… 계단 물기가 보였어야 했는데”라며 계속 자기 탓을 하더라고요.

그때 저는 무릎이 살짝 아픈 걸 느꼈어요. 바닥이 미끄러우니 잡는 순간 관절이 비틀리거든요. 그래도 아이는 괜찮아 보였고, 엄마도 아이를 안고 나서야 조금 숨을 고르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냥 옆에서 “괜찮습니다. 이제 천천히 내려가요” 하고 말해주고, 유모차 손잡이를 잡아 준 채로 한 칸씩 조심조심 이동시켜 드렸어요.

주변에 있던 분들도 “어떻게 됐대요?” “다행이다” 하면서 말은 많이 걸었는데, 엄마는 끝내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어요. 저는 솔직히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상황에서 손이 닿은 게 다였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만 엄마가 “진짜 우리 아이가 그렇게 아슬아슬했을 줄 몰랐어”라고 하면서 목소리가 떨리길래, 그제야 제가 느끼는 긴장도 같이 풀리는 것 같았어요. 그 순간 ‘다음 사람도 누군가 잡아줄까?’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어요.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제 신발 밑창이 거의 물기랑 먼지에 젖어 있었고 무릎은 멍이 살짝 들었더라고요. 근데 이상하게도 속상하거나 억울하진 않았어요. 오히려 “내가 그 자리에서 멈추기만 했어도” 같은 상상은 더 아찔해서, 그날의 선택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어요. 사람들 사이에선 대단히 착한 척 같은 말이 필요 없는데,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그 한 번이 생명의 차이를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다음 날부터는 같은 계단을 볼 때마다 속도가 자동으로 줄어요. 비 오는 날엔 특히요. 계단 하나, 바닥 물기 한 번이 누군가에겐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 유모차가 미끄러지던 소리와 아이 울음이 아직도 가끔 떠오르지만, 그 덕분에 저는 매번 더 조심하고 더 먼저 손을 뻗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요. 결국 우리 동네는,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주는 작은 용기들이 이어지는 곳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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