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로 산 책이 전부 메모 되어 있어서 당황한 썰
중고로 산 책이 전부 메모 되어 있어서 당황한 썰, 진짜 생각도 못 했던 일이라 아직도 가끔 그때 화면이 떠올라요. 어느 날 눈에 띄는 헐값에 책 한 권이 올라왔길래 그냥 “상태만 괜찮으면 됐지” 하고 바로 주문했거든요.
택배 와서 비닐 벗기는 순간엔 기분이 좋았습니다. 겉표지는 살짝 구김이 있었지만 내용물은 멀쩡해 보였고, 무엇보다 새 책 느낌처럼 깔끔했어요. 저는 그저 읽고 정리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확 바뀌더라고요.
책 첫 장에서부터 연필로 메모가 줄줄이 적혀 있었어요. “이 부분은 시험에 꼭 나온다” 같은 식의 문장이 아니라, 읽는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정리한 흔적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죠. 처음엔 저도 “아, 누가 밑줄 그어놨나 보다” 정도로 가볍게 넘겼는데, 페이지를 바꿀수록 메모가 더 많아졌어요.
정말 당황했던 건 메모가 단순히 밑줄이나 짧은 표시가 아니라는 점이었어요. 문단 옆 여백에 글쓴이 생각이 덧붙어 있고, 어떤 문장은 아예 다른 예시를 붙여서 설명해놨더라고요. 그리고 어떤 건 날짜까지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 밤에 읽고 다시 봄” “이 문장 보고 친구한테 링크 보냄” 이런 식으로요. 책이 책인데, 그 사람의 생활이 함께 붙어 있는 느낌이라 묘하게 등골이 서늘했어요.
그래도 일단은 읽어보자 싶어서 넘어갔어요. 그런데 몇 장 못 가서 “이러다 원래 문장보다 메모를 더 읽게 되겠는데?”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메모가 제일 앞장부터 이미 리듬을 타고 이어져서, 제 머릿속 흐름도 같이 끌려가 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원래는 그냥 책을 읽는 건데, 갑자기 누군가가 옆에서 설명해주는 기분이랄까요.
한 번 더 충격이었던 건, 제가 기대하던 “중고니까 아무 메모 없겠지”가 아니라 거의 전부가 메모로 채워져 있었다는 거예요. 목차부터 이미 표시가 되어 있었고, 챕터가 시작될 때마다 “여기서 포인트는 이거” 같은 요약이 적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제가 모르는 사람이 쓴 줄 알았던 문장이 사실 그 메모를 옮겨 적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서, 잠깐 멈칫했어요. 내가 지금 책을 읽는 건지, 누군가의 독후감 모음집을 펼친 건지 헷갈릴 정도였거든요.
그래서 저는 좀 고민했어요. 이걸 지워야 하나? 아니면 그냥 두고 읽어야 하나? 중고 거래라서 수리 가능한 수준이면 괜찮은데, 이건 거의 흔적이 아니라 “부가 콘텐츠”였거든요. 혹시 당사자 입장에서는 민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작정 지우진 못하겠더라고요. 결국 저는 “그 사람의 공부 흔적을 존중하자” 쪽으로 마음을 정했어요. 그런데 마음을 정하니까 오히려 더 신경 쓰이는 게 생겼습니다.
메모 중에 가끔은 웃긴 내용도 있었어요. 예를 들면 어떤 문장 옆에는 “이거 어려운데, 이해되면 그날 공부 잘 된 날임” 이런 자조 섞인 말이 있고, 다른 페이지에는 “이 부분은 필기하다가 말투 바뀌었다” 같은 농담도 있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점점 책 내용 자체에 집중되기 시작했어요. 이상하게도 그 사람의 방식이 보이니까, 제가 모르는 부분에서 어디에 막혔을지 상상하게 되더라구요. 책이 혼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을 거쳐 지금 제 손에 온 거구나 싶어서 마음이 좀 누그러졌습니다.
다만 마음이 따뜻해진 것과 별개로, 한편으론 찝찝함도 남았어요. 중고 판매글에는 그런 설명이 없었거든요. “메모 있음” 정도만 적혀도 저는 애초에 다른 걸 샀을 텐데, 저는 그냥 생각 없이 결제했던 거니까요. 그래서 구매처에 문의를 해볼까 하다가도, 너무 예민하게 느껴질까 싶어서 결국은 그냥 읽기로 했습니다. 대신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 한 줄만 적어두기로 했어요. “저도 읽으며 이해했어요, 메모 덕분에 길 잃지 않았습니다” 같은 식으로요.
마지막에 책을 덮고 나니까 이상하게 기분이 복잡했어요. 누군가가 진짜로 오래 붙잡고 공부했던 흔적을 제가 가져간 셈이니까요. 그 사람의 메모는 지워지지 않고, 지금은 제 경험 속에 섞여 남아있더라고요. 중고거래니까 원래 그런 변수가 있을 수야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의 시간이 같이 들어오는 건 예상 못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중고 책 보면 더 꼼꼼히 살피게 되고, 누군가의 필기에도 조금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보내게 돼요. 다음엔 또 어떤 책이 제 손에 오게 될지, 그게 은근히 기대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