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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서 기사님이 목적지 주소를 말하자마자 고개를 숙였어

2026-09-30 16:29:11 조회 0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택시에서 기사님이 목적지 주소를 말하자마자 고개를 숙였어. 처음엔 운전 중 피곤해서 그런 건가 싶었는데, 그게 너무 빨랐어. 내가 “여기요” 하고 주소를 부르기도 전에, 기사님이 먼저 키패드 쪽을 보다가 확 고개를 떨군 느낌이랄까. 차 안 공기가 갑자기 얇아진 것처럼 느껴졌고, 음악도 그때부터는 귀에 잘 안 들어오더라.

나는 늦은 밤에 회사 끝나고 혼자 타고 있었어. 비가 오진 않았는데 도로가 젖어 있었고, 창밖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져 바닥에 끌리듯 지나갔지. 기사님은 말수가 적었는데, 보통은 목적지 물어보면 “아 네” 정도는 하거든. 근데 그날은 내가 주소를 말하는 순간,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이름을 부른 것처럼 반응했어.

주소를 말하자마자 기사님이 고개를 숙인 뒤,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쪽은… 오늘은…” 하고 중얼거리더라. 나는 “네? 아, 괜찮아요. 그냥 가시면 돼요” 이렇게 웃어 보였는데, 그 웃음이 입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기사님 손이 핸들 위에서 멈칫했어. 내비 화면에서는 같은 길인데, 기사님은 차선을 바꿔야 할 타이밍에 잠깐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버렸고, 그 순간 차가 아주 살짝 옆으로 밀리는 느낌이 났어.

정말 이상한 건, 기사님이 고개를 숙인 채로 계기판만 보고 있었다는 거야. 뒤늦게 물어보려고 보니 눈이 마주치지 않았어. 평소 같으면 거울로 한 번 확인할 텐데, 그날은 검은색 틈 사이로 눈동자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지. 그리고 가끔씩 “지금은 말하면 안 돼” 같은 말을 입 안에서 삼키는 것처럼 들렸어. 정확히는 단어는 안 들리는데, 말하려다 멈추는 숨소리 같은 게 있었어.

나는 혹시 길이 공사 중이라서 그러신가 했어. 그래서 “길 막히면 다른 데로 돌아가셔도 돼요. 그냥 빨리만요”라고 했지. 그러자 기사님이 갑자기 핸들을 반대 방향으로 꺾어서 골목으로 들어갔어. 내비는 직진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방향표지판도 없는 골목으로. 그 골목은 늘 있는 상가 골목 같았는데, 가로등이 유독 낮았고 그림자가 너무 길게 늘어져 있었어.

골목 끝에는 폐업한 듯한 간판이 하나 있었는데, 불이 꺼져 있음에도 글자가 선명했어. 마치 누가 일부러 그 간판만 닦아놓은 것처럼. 기사님은 차를 세우지 않았고, 그냥 천천히 지나가는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는 사람 같은 실루엣이 잠깐 스쳤어. 사람 맞는지 확신이 없어서 눈을 몇 번 깜빡였거든. 근데 기사님은 그걸 본 것처럼 더 빨리 숨을 들이켰고, 다시 고개를 푹 숙였어.

그때 내 휴대폰이 진동했어. 회사 메신저 알림이었는데, 내용은 “지금 출근 처리된 주소로 이동 중인가요?” 이런 식이었어. 나는 아직 출근한 게 아닌데, 왜 그런 말이 와 있지 싶어서 화면을 확인하려는 순간 기사님이 갑자기 “주소는… 다시는 안 말하는 게 좋아요”라고 잘라 말했어. 말투가 퉁명스럽다기보다, 누가 뒤에서 귀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처럼 긴장돼 있었거든.

나는 그제야 내비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어. 목적지로 가는 경로가 지워진 것처럼 잠깐 멈춰 있다가, 다시 이상한 경로를 그리기 시작했거든. 그리고 화면 상단에 아주 짧게, 누가 입력한 것 같은 글자가 뜨는 걸 봤어. 정확히 읽히진 않았는데, ‘이미 도착됨’ 같은 문장 느낌이었어. 나는 웃으면서 “아, 오류인가 봐요”라고 넘기려 했는데, 그 순간 차 안에서 아주 조용한 소리가 났어. 딸깍 하는 버튼 소리 같았는데, 어디서 나는지 찾을 수가 없었어.

그 소리 뒤로 기사님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도로는 갑자기 넓어졌어. 마치 내가 타고 있던 시간대가 한 번 밀려나는 것처럼. 결국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는데, 내가 고개를 돌려 기사님을 보니, 기사님은 거울을 보지 않고 계기판만 보고 있었어. 그리고 내릴 때 카드 결제를 하려고 단말기를 확인하는데, 영수증이 출력되면서 종이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어. 기사님은 영수증을 주지 않았고, “조심히 들어가요” 한마디만 남기고 문을 잠그듯 손을 움직였지.

나는 그날 밤 집에 와서 주소를 다시 확인했어. 분명 내가 말한 곳이 맞는데, 이상하게도 지도에는 거기가 ‘폐쇄된 구역’으로 표시돼 있었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반 건물로 보였던 곳인데, 등록 정보가 바뀌어 있더라.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은 기사님이 고개를 숙이던 그 순간이 떠올라. 목적지를 말하는 순간 누군가의 시선이 차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서, 지금도 길 물어볼 일이 생기면 내 입이 먼저 움직이기 전에 숨부터 고르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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