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에서 기사님이 목적지 도로명 대신 건물 이름을 말했어
택시에서 기사님이 목적지 도로명 대신 건물 이름을 말했어. 처음엔 그냥 길찾기 편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기사님이 내릴 곳을 설명하는 방식이 너무 확신에 차 있었거든. “여기서 직진 말고, 그 건물… 아니, 정확히는 ‘○○리빙’ 앞에서 세워주세요.” 내가 주소를 찍어 드린 것도 아닌데 기사님이 딱 잘라 말해서,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어.
그날 밤 늦게까지 일하고 나와서 택시를 잡았어. 앱으로 호출했고, 기사님이 오셔서 인사하자마자 “어디로 가세요?”라고 물었지. 나는 메모해둔 도로명 주소를 불러주려고 했어. 그런데 기사님은 내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손을 살짝 들더니, 휴대폰 화면을 보지도 않고 곧장 “도로명 말하지 마세요. 그 앞이 제일 빨라요.”라고 했어.
처음엔 운전하면서 길이 헷갈리지 않게 하려는 말인 줄 알았어. 그래서 “지도에서 뜨는 주소가 이건데요.” 하니까 기사님이 고개를 한 번만 끄덕이고, “맞아요. 지도는 항상 그걸 다른 이름으로 바꾸지. 근데 택시는 결국 건물 이름으로 가야 편하잖아요.”라고 하더라. 솔직히 그 말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도 더 이상 따지지 못하고 그냥 시키는 대로 앉아 있었어.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어. 신호를 기다릴 때 기사님이 내 쪽을 보지도 않고 “손님이 찾는 건 3층짜리 건물 맞죠? 엘리베이터 고장 난 곳.” 이런 말을 툭 던졌거든. 나는 그 시간에 내 목적지를 설명할 일이 없었어. 그런데도 기사님은 내가 가려는 곳을 마치 이미 다녀온 사람처럼 말했어.
나는 순간 “기사님, 그거 어떻게 아세요?” 하고 묻고 싶었는데 입이 잘 안 떨어졌어. 택시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거든. 창밖은 비가 조금씩 내렸는데, 와이퍼 소리랑 엔진 소리만 반복됐고 기사님은 내비게이션도 켜지 않은 것처럼 보였어. 내비를 안 켠 것도 확실한 게, 화면을 봐도 목적지 경로가 아니라 그냥 기본 화면만 떠 있었거든.
그런데 차가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더 이상한 걸 눈치챘어. 내 주소를 찍어서 보낸 게 아니라면, 기사님이 왜 그 골목을 정확히 골라 들어오는지 설명이 안 됐어. 길이 살짝만 틀어져도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기사님은 매번 아주 미세하게 꺾더라. 마치 누군가가 “여기로 가라”고 이미 정해준 것처럼.
그때 기사님이 다시 한 번 말했어. “앞에 ‘○○리빙’ 간판 보이죠? 손님이 찾는 건 도로명이 아니라 그 간판이에요. 도로명은 밤에 자주 바뀌거든요.” 이 말이 너무 뜬금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는데, 웃기기엔 목소리가 너무 차분했어. 그리고 잠깐, 손님이 찾는 건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내 이름이나 호칭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단정하듯 말했거든.
내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확실히 느낀 건, 택시가 목적지 바로 앞에서 멈출 때야. 기사님이 브레이크를 밟기 직전에 “여기요. 문 열리기 전에 내려야 해요.”라고 했어. 하지만 난 내 목적지가 “문 열리기 전에” 뭘 해야 하는 곳인지도 말한 적이 없어. 나는 기사님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문 쪽을 보다가, 차가 완전히 멈추자마자 문손잡이를 잡았어.
내가 내리려는 순간, 기사님이 뒤를 돌아보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했어. “주소는 지도에만 있어요. 사람들 기억엔 건물 이름만 남거든요.” 그리고는 속도를 다시 올리더라. 택시는 그냥 사라지듯 빠져나갔는데, 내가 내린 그 장소는 정말로 내가 생각했던 것과 딱 맞았어. 그런데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이유는, 알고 보니 내가 가려던 곳이 건물 이름으로 검색해도 바로 나오긴 하는데, 도로명으로는 이상하게도 다른 번호가 같이 뜨는 구조였거든.
그 밤 이후로는 도로명만 외우고 다니는 버릇이 생겼어. 괜히 건물 이름만 떠올리면, 그 택시 안에서 들었던 차가운 확신이 자꾸 머릿속에 남더라. 누가 그걸 “다 아는 것처럼” 말해주면, 고마워야 할지 아니면 겁을 먹어야 할지—그 경계가 어느 순간부터 무뎌지지 않더라고. 택시에서 건물 이름을 들은 순간, 내 목적지가 아니라 ‘내가 기억하는 방식’까지 누군가가 알고 있는 것 같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