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기사님이 목적지 말고 ‘기억’부터 물어보던 날
택시 기사님이 목적지 말고 ‘기억’부터 물어보던 날이 있어요. 그날도 평소처럼 퇴근하고 늦은 시간, 동네까지 혼자 타고 가려던 참이었는데요. 기사님이 “어디까지 가세요?”라고 묻기 전에, 제가 목적지를 입에 올리기도 전에 먼저 제 쪽을 힐끗 보더니 아주 느리게 말하더라고요. “잠깐만요. 오늘… 기억, 어떤 쪽이세요?”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어요. 요즘 기사님들 심심하면 말 트는 방식이 다양하잖아요. 그래서 “네? 목적지는 제가 말하면 되죠?” 하고 웃으며 넘기려 했는데, 기사님은 웃지 않고 손에 힘을 줬어요. 신호에 걸리자 브레이크를 살짝 밟는 타이밍이 평소보다 더 길었고, 그 틈에 “기억이요. 오늘 출발하기 전에, 뭘 떠올릴 수 있는지.” 같은 말이 이어졌어요.
전 솔직히 그때 마음이 좀 덜컥 내려앉았어요. 택시에 탄 순간부터 어딘가 공기가 이상했거든요. 창문을 살짝 내릴까 싶었는데, 옆 차선 정체 때문에 창문을 내리는 게 애매했어요. 대신 기사님이 계속 같은 톤으로 “아무거나 말해도 돼요. 어제 기억, 아니면 아침 기억. 어떤 게 먼저 올라오나요?”라고 묻는데, 질문이 너무 구체적이라 말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저는 “어제는… 친구랑 카페 갔던 거요”라고 대충 답했어요. 그랬더니 기사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표정은 이상하게 굳어 있었어요. “카페가 어디였는지까지 기억나세요?” “네, 대충 상호랑… 아니, 정확히는 잘 모르겠네요.” 제가 말을 마치자 기사님이 핸들을 아주 작게 바로잡았고, 속도를 더 낮췄어요. 그러고 나서 “그럼 괜찮아요. 오늘은 아직 덜 섞였네요.”라고 중얼거렸는데, 그 한 문장이 제 등골을 훑고 지나갔어요.
목적지 얘기는 계속 미뤄졌어요. 저는 “기사님, 목적지는 제가 아까 말씀….” 하려 했는데, 기사님이 손을 들어 제 말을 막듯이 하더니 “지금 목적지 말하면 안 돼요. 기억이 먼저 정렬돼야 해요.”라고 단정했어요. 웃기지 않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때부터 차 안에서 라디오 소리도 잘 안 들리더라고요. 원래는 잔잔하게 틀어두는 편인 기사님인데, 그날은 주파수가 자꾸 어긋나는 것처럼 가늘게 끊겼고, 결국은 완전히 소리가 죽었어요.
기억 얘기가 너무 길어지니까, 제가 혹시 술을 마셨나 싶기도 했고, 아니면 제가 전날 무슨 일을 했나 싶기도 했어요. 그래서 “저 아까부터 좀 이상한데요. 혹시… 제가 뭘 잘못했나요?”라고 묻자 기사님이 잠깐 거울을 봤어요. 그리고 아주 낮게 “잘못이 아니에요. 사람은 원래 자주 잊죠. 다만 어떤 날은 잊는 방향이 바뀌는 날이 있어요.” 그 말 끝에 “오늘은 그날 같아서요.”라고 덧붙이는데, 그 톤이 너무 확신에 가까웠어요.
그때 전 드디어 목적지를 말하려고 했죠. “저는 회사 근처에서 내리…”라고 시작하는데, 기사님이 또 멈칫하더니 “아니, 거긴 내려도 돼요. 근데 내리기 전에 한 번만 확인하자고요.”라고 했어요. 그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제 손에 쥐어진 휴대폰을 눈으로만 체크하듯 보고는 “오늘 날짜, 몇 일이죠?”라고 물었어요. 저는 “이게… 10월 5일이요.”라고 답했는데, 기사님은 그제야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어요.
그 다음엔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연달아 터졌어요. 목적지 근처에 가까워지자 기사님이 “여기서 조금만 더요. 아직 기억이 완전히 붙지 않았어요.”라고 하더니, 동네 길을 지나치듯 돌아서 다른 골목으로 차를 꺾었거든요. 저는 “여기 아닌데요”라고 말했지만, 기사님은 조용히 “괜찮아요. 택시는 길을 알아서 가는 게 아니라, 기억이 가는 대로 따라가는 거예요.”라고 했어요. 그 말이 농담 같지 않아서, 전 더는 반박을 못 했어요.
결국 차가 한 정거장 거리쯤 더 가서, 제가 원래 생각했던 목적지와 비슷한 쪽에서 멈췄어요. 기사님은 요금을 말하지도 않고, “내리기 전에요. 방금 전에 떠올린 카페가, 실제로는 어떤 향이었는지 한 번만 생각하세요.”라고 했어요. 저는 머릿속을 더듬어 봤죠. 초콜릿 같은 달큰한 향이 떠오르긴 했는데, 확실하진 않았어요. 그때 기사님이 제 쪽을 보고 “그게 맞아요. 기억이 끝까지 남아있는 게 아니라, 남아있는 척하는 거라서.”
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끝내 다 이해하진 못했는데, 내리는 순간에 손목이 살짝 차가워지더라고요. 택시 안 냉기가 아니라, 제 피부가 갑자기 서늘해진 느낌이었어요. 기사님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그냥 “조심히 가세요. 오늘은 빠져나갈 수 있는 날이니까요.”라고만 했어요.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하자, 저는 뒤를 돌아봤는데 기사님 얼굴이 보이질 않았어요. 마치 창밖에 비친 게 아니라, 제 시선 속에서 잠깐 비슷한 모양만 지나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생각해보니, 기사님이 처음 물어본 ‘기억’이 제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면서, 이상하게도 제가 그날 들었던 말의 순서가 자꾸 바뀌어 보이더라고요. 그때부터 전 택시를 탈 때마다, 목적지만 말하고 끝내지 못하게 됐어요. 어떤 날은 ‘목적지’보다 먼저, 내 안의 기억이 정렬되는지부터 확인하게 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