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복사기에서 나온 종이가 내 이름이 아니었다
회사 복사기에서 첫 장이 뽑힐 때, 나는 왜인지 손이 먼저 멈췄다. 보통은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이 A4 한 장이 깔끔하게 떨어지는데, 그날은 종이가 바닥에 닿자마자 등 뒤가 서늘해졌다. 표지 같은 것도 없고, 딱 업무용 문서처럼 보였는데 상단에 찍힌 글씨가 내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은 내 것이 아니었다.
처음엔 단순한 오해라고 생각했다. 복사기 근처에는 늘 여러 사람이 드나들고, 파일도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니까. 그래서 나는 종이를 집어 들고 문서 번호를 확인했다. 회사에서 쓰는 양식 그대로였고, 하필이면 내 부서에서만 쓰는 양식이었다. 하지만 내 이름 옆에 적힌 글자는 분명 내 것과 달랐다. 같은 발음의 다른 성씨랄까. 마치 누가 일부러 ‘비슷하게’ 맞춰 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바늘이 한 번씩 몸을 찌르는 것처럼 신경이 쓰였다. 복사기 옆 창문으로는 퇴근 시간 전의 건물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고, 복사기 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크게 들렸다. 나는 문서를 들고 담당자 메일함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그 문서 번호로 올라온 기록은 없었다. 결재라인도 뜨지 않았고, 내부 공유 폴더에도 해당 파일이 없었다.
“혹시 프린터 오류인가?” 하고 생각하며 복사기 화면을 봤다. 화면엔 ‘인쇄 완료’라고만 표시돼 있었다. 로그를 볼 수 있는 관리자 모드 같은 건 내가 평소에 만질 일이 없어서, 버튼만 눌러 봤다. 그런데 복사기에서 출력된 종이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이 약간 어긋나 있었다. 정상적으로 문서가 쌓였으면 모서리가 맞아야 하는데, 마지막 장은 3~4밀리 정도 비켜 있었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다시 넣고, 다시 뽑은 흔적처럼.
나는 그 종이를 들고 팀장에게 가져가려 했다. 근데 이상하게도 손에서 종이가 무겁게 느껴졌다. ‘이걸 가져가서 누가 웃을까’ 같은 생각이 들기 전에, 문서 상단에 있는 작은 메모 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내 이름으로 오지 말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필체는 회사에서 자주 보는 프린트 글꼴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적은 듯한 필기체였다. 그리고 그 필기체가, 내 책상에 붙어 있던 메모지와 똑같은 압력으로 눌려 있었다. 그 메모지는 내가 어제 밤에 급히 적어 둔 개인 메모였는데, 오늘 아침에 이미 버렸다고 생각했거든.
팀장에게 말하기도 전에, 복사기에서 다시 종이가 ‘퍽’ 하고 떨어졌다.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이름이 아예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상단에 날짜가 찍혀 있었는데, 오늘 날짜가 아니라 내 생일이 적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생일의 전날 밤, 내가 집에서 일정한 이유로 깜빡 잊고 메모를 적어 둔 날. 회사에서 그런 정보가 출력될 이유가 없었다. 더 무서운 건, 문서 제목이 내가 어제 밤에 검색했던 키워드와 거의 같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회사 파일 목록엔 없던 내용인데.
그날 나는 복사기를 피해 다녔다. 점심시간에 같이 일하는 대리에게 “복사기 요상하던데?”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괜히 내가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까 봐서. 대신 나는 사내 보안 담당자에게 조심스럽게 문의했다. 출력 로그는 어디까지 남는지, 그리고 복사기에 내부적으로 캐시나 임시 저장 같은 게 남는지 물었다.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요즘 복사기들은 기본적으로 출력 시각과 사용자 계정이 찍힙니다. 사용자 계정이 안 뜨는 건 거의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나는 문서를 다시 자세히 봤다. 처음엔 글씨만 봤는데, 종이 가장자리 쪽에 아주 옅은 표시가 있었다. 마치 복사 과정에서 남는 흔적처럼, 바코드도 아닌 숫자 조합이 인쇄돼 있었다. 그런데 그 숫자 조합이 내 개인 노트북의 비밀번호 마지막 네 자리와 같았다. 물론 직접적으로 연결되진 않지만, ‘우연치고는 너무 비슷한 자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이상하게도 내가 그날 아침 회사 들어오면서 복사기 앞에서 멈춰 섰던 순간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급하게 뒤에서 밀어 넣어 준 것처럼, 딱 한 번 스치듯 지나갔던 기억.
퇴근 후 집에 와서도 그 종이가 계속 눈앞에 남아 있었다. 결국 나는 다음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복사기 담당자에게 종이를 보여 주고, 출력 로그 확인을 요청했다. 담당자는 한참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건 출력된 기록이 아니라… ‘누군가가 넣어서 다시 뽑은 것’처럼 보이는데요. 계정 흔적이 이상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복사기 문을 닫는 순간 나는 아주 짧게 ‘딱’ 하는 소리를 들었다. 마치 안쪽에서 무언가가 제자리에 맞물리는 소리 같았다.
그 이후로 회사 복사기는 늘 정상처럼 보였다. 종이도 깨끗하게 나오고, 오류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책상 근처만 지나가면 종이 냄새가 먼저 코끝에 닿았다. 그리고 가끔, 내가 버렸다고 생각한 메모지의 문장 일부가 눈에 걸렸다. “내 이름으로 오지 말 것.” 나는 그 문장을 누가 적어 두었는지 아직도 모르지만, 한 번은 잊어버린 척하고 지나가려다 멈칫한 적이 있다. 그때 복사기 앞에 떨어져 있던 새 종이의 상단에는, 내 이름과 닮은 글씨가 또 있었다. 이번엔 내가 더 빨리 손을 멈췄다. 손이 멈춘 순간, 누군가 뒤에서 종이를 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바닥에서 종이가 아주 조용히 ‘퍽’ 하고 시작되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