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 벽지에 연필로 적힌 날짜가 계속 바뀌었다
원룸 벽지에 연필로 적힌 날짜가 계속 바뀌었다. 처음엔 그냥 누가 장난치는 건가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날짜가 매일 밤마다 한 칸씩 밀리더라. 나는 원래 벽지에 신경 안 쓰는 타입이라, 누가 뭔가 적어둔 걸 본 것도 사실 우연이었어. 그날 밤 늦게까지 유튜브 보다가 불을 끄고 누우려는데, 방 한쪽 구석에 연필 글씨가 보이는 거야. 날짜는 달랑 숫자만 또렷했는데, 왜 하필 벽지에… 싶은 느낌이 들었지.
적혀 있던 건 “10/3”였어. 종이 메모도 아니고 포스트잇도 아니고, 벽지 표면에 직접 연필로 긁어쓴 것처럼 굴곡이 느껴졌어. 처음엔 “누가 이 방 쓰다가 남긴 거겠지”라고 넘겼는데, 내가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됐거든. 관리실에 물어볼 생각도 했지만, 귀찮아서 그냥 넘어갔고 다음 날 출근 준비하면서 한 번 더 봤어.
그런데 그날 아침엔 날짜가 “10/4”로 바뀌어 있었어. 손톱으로 살짝 문질러보면 지워질 것 같긴 했는데, 문질러도 뭉개지지 않고 그대로였어. 벽지가 젖은 흔적도 없었고, 누가 일부러 덮어 쓴 느낌도 아니었어. 방 안에 창문은 맞바람 거의 안 들어오는 편이고, 환기해도 벽지가 이런 식으로 새로 써질 일은 없잖아. 그때부터 솔직히 등골이 서늘해지더라.
나는 그날부터 날짜를 확인하는 루틴을 만들었어. 아침에 양치하면서 한 번 보고, 퇴근하고 돌아와서 또 봤지. 매번 밤사이에 바뀌었고, 낮에는 그대로 유지됐어. 이상한 건 바뀌는 방식이 “고쳐 쓴다”가 아니라 “그 날짜가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는 거야. 연필 자국은 똑같이 얇게 긁혀 있었고, 숫자 사이 간격도 매번 동일했어. 내가 멍하게 볼 때마다 숫자가 살짝 흔들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지.
그래서 나는 확실히 확인해보려고, 그 부분만 얇은 투명 테이프로 덮어뒀어. 연필 글씨 위에 테이프를 붙이면 적어도 “누가 그 위에 다시 쓰는 건지”는 알 수 있으니까.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테이프를 떼보니, 테이프 아래 벽지엔 그대로 숫자가 남아 있었어. 테이프를 붙였을 때 연필이 긁혀있던 모양이 그대로였는데, 날짜는 또 바뀌어 있었어. “10/6”이었어.
그때부터는 누굴 의심하기 시작했어. 같은 층에 사는 사람들, 복도 청소하시는 분, 심지어 관리실 직원까지. 하지만 생각해보면 다 말이 안 됐어. 나는 출입문에 비밀번호도 있고, 현관문엔 방문 손잡이 근처에 작은 긁힘이 남는 편인데 그런 흔적도 없었거든. 게다가 그 숫자는 방 안 구석, 내가 앉아있을 때는 잘 안 보이는 각도에 있었어. 누가 들어와서 일부러 그 위치를 보고 써야 하는데, 그럴 동선이 전혀 안 나와.
하루 이틀 지나면 적응이 되잖아. 근데 이건 적응이 아니라, 계속 “다음이 뭐지”만 생각하게 됐어. 날짜가 10/7, 10/8… 이렇게 올라가는데, 이상하게도 숫자가 커질수록 글씨의 압력이 조금씩 진해지는 것 같았어. 마치 누가 점점 급해지는 것처럼. 난 그걸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손이 먼저 식어버렸어. 가끔 새벽에 깼는데, 그때마다 방이 조용했고, 소리는 없었는데도 뭔가 “이미 하고 있는 중” 같은 공기가 느껴졌거든.
그날은 우연히 비가 많이 왔어. 창문 틈으로 물기 냄새가 스며들고, 벽지가 평소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던 날. 나는 불안해서 그 날짜 부분에 검은색 볼펜으로 덧칠해버렸어. “어차피 연필이든 뭐든, 이렇게 하면 끝이겠지”라는 생각으로.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덧칠한 자국이 지워진 게 아니라 그 위에 다시 연필로 날짜가 적혀 있는 거야. 덧칠 아래에서 연필이 올라온 것처럼, 글씨가 더 뚜렷했어. “10/9”였고, 내가 보자마자 숨이 멎는 줄 알았어.
그 후로는 숫자가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됐어. 한편으론 장난처럼 보일 여지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딱 정해진 속도처럼 바뀌었거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날짜가 바뀔 때마다 내 생활도 묘하게 흔들렸어. 그날 날짜가 바뀌고 나면, 출근길에 버스 노선이 바뀌거나, 누군가 연락을 보내거나, 꼭 “그 날짜에 맞춘 사건” 같은 느낌이 붙어버렸지. 물론 우연일 수도 있지만, 계속 겹치니까 그 우연이 쌓여서 공포가 되더라.
마지막으로 날짜가 “10/11”로 바뀐 밤, 나는 더는 확인하지 않기로 했어. 근데 잠들기 직전, 벽 쪽에서 연필을 긁는 아주 얇은 소리가 들리는 거야. 방 안은 조용했고, 누구도 내 방에 들어올 수 없는 구조인데도 소리는 분명했어. 결국 다음 날 아침엔 벽지에 날짜가 아니라 “11/…”처럼 숫자 하나가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어. 끝까지 완성되기 전에 내가 눈을 뜬 거라면, 그건 너무 늦은 게 아니라 “아직 시작 전”이라는 뜻일지도 모르잖아. 나는 지금도 가끔 벽지 구석을 쳐다보게 돼. 날짜가 또 바뀔까 봐가 아니라, 혹시 이번엔 숫자가 아니라 다른 걸 적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