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최신글
자유/잡담 괴담 추천 0

택시에서 기사님이 내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2026-10-12 16:29:14 조회 1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택시를 타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비 오는 저녁이었고, 나는 그냥 집 근처로 가면 되니까 대충 주소만 보여주고 “여기요” 하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기사님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리 고개를 돌리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쪽이요” 하고 목적지를 딱 잘라 말하는 거다. 순간에 “네?” 하고 되물었는데, 목적지가 내가 말하려던 그 주소랑 똑같았다.

처음엔 내가 차를 잡을 때 주변을 너무 뻔히 봤나 싶었다. 정류장 근처에서 길을 확인하긴 했고, 휴대폰으로 지도도 잠깐 켰으니까. 그런데 기사님은 그 뒤에 더 구체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골목으로 들어가면 신호가 없어서 빨라요. 아, 거기 우체국 옆 버스정류장 말이죠.” 나는 우체국 옆 버스정류장까지는 생각으로만 정리했지, 기사님한테 한 번도 설명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아세요?”라고 묻자 기사님은 웃지도 않고 후드득 물을 튕기듯 핸들을 잡았다. “손님이 고르시는 길은 다 보이잖아요. 지금 날씨에 그 코스로 가면 시간 딱 맞아요.” 말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질문이 실수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이상한 건 이상했다. 나는 앱으로 탔고, 주소는 앱에만 떠 있었으니까 누가 봤다고 해도 내 정보가 기사님 화면에 그대로 노출됐다는 뜻인데… 그럴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한참을 달리는데, 기사님이 갑자기 속도를 살짝 줄이더니 내 쪽을 봤다. “손님, 오늘 일정 바뀌었죠?” 나는 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사실 내 일정이 방금 전 통보를 받았던 터라, 나도 아직 확정된 건 아니었지만 마음이 흔들리긴 했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였고, 택시 타기 전에도 통화로 짧게 흘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기사님은 ‘바뀌었다’고 단정하는 톤이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뭐라고요? 일정요?” 했더니 기사님이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아뇨, 그냥요. 손님 표정이 그래요.” 그 말이 단순한 공감처럼 들리려다, 오히려 더 찝찝했다. 얼굴 표정으로 일정까지 맞힐 수 있다는 건 결국 아무 말이나 가능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기사님은 목적지부터 시작해서 자꾸 내 생각의 빈틈을 더듬는 느낌을 줬다.

그때 나는 조용히 앱 화면을 확인했다. 목적지는 그대로였고, 기사님에게 따로 메시지를 보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기사님이 말한 우체국 옆 버스정류장은, 내 앱 경로에도 ‘도착지 부근’으로 표시되긴 했지만 정확히 그 표현은 내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지도에서 뜨는 명칭을 그대로 읽는 건가 싶기도 했는데, 기사님은 마치 누군가에게 설명하듯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정면에 큰 간판 하나 있죠. 그거 뒤로 들어가시면 돼요.”

차가 다시 골목을 꺾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 간판은 평소엔 꺼져 있었고, 비 오는 날엔 반사 때문에 잘 안 보이는데도 기사님은 정확히 짚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누가 내 정보를 전달한 건가’ 같은 생각을 했지만, 택시가 움직이는 동안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더 불안해진 건, 내가 기사님을 의심하는 순간부터 ‘내가 뭘 더 말하면 더 맞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거다.

“기사님, 혹시 기사님이 제 정보를…?” 하고 물으려다 말았다. 대신 그냥 “요즘 길이 많이 막히잖아요” 같은 말로 돌렸는데, 기사님이 먼저 끊었다. “정보는 필요 없어요. 손님은 여기로 오려고 마음을 먹었고, 마음은 길을 끌어오죠.” 이 문장을 들었을 때는 무슨 종교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기사님 얼굴은 전혀 그쪽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창밖을 보고 운전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 이상했다.

마침내 차가 내 목적지 앞에 멈췄다. 나는 내리기 전에 기사님을 한번 더 봤다. 기사님은 미터기를 확인하듯 화면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조심히 들어가세요”라고 말했다. “아까 말씀드린 일정… 오늘은 보류하는 게 나을 거예요.” 나는 정말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사님은 마치 내가 방금 전까지 고민하던 문장을 옆에서 받아 적어둔 것처럼 정확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목적지를 맞히는 건 단순한 운전 실력이 아니라, 내가 택시에 타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던 흐름’을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느낌.

내가 문을 열고 내릴 때, 기사님은 더 말하지 않았다. 차창 너머로 빗물이 흐르고 있었고, 기사님의 얼굴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내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차 안에서 아주 작게 스마트폰 알림 소리가 났다. 나는 멈춰 서서 들었는데, 알림음은 낯설지 않았다. 내가 방금 전 집에서 확인하려다 미뤄둔 알림과 같은 음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택시를 탈 때마다, 목적지가 맞는지보다도 내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들이 먼저 도착해버리진 않았는지 계속 확인하게 됐다. 왜인지도 모르겠는데, 그날의 기분만큼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 글 반응 남기기
추천과 비추천은 회원당 1회만 가능하며, 다시 누르면 취소됩니다.
추천 0 · 비추천 0
글 신고 안내
같은 회원은 같은 글이나 댓글을 1회만 신고할 수 있으며, 누적 신고가 5회 이상이면 자동으로 숨김 처리됩니다.
현재 글 신고 0회

댓글

댓글 작성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