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거래로 산 책에서 눌린 자국이 페이지마다 남아 있다
중고거래로 산 책에서 눌린 자국이 페이지마다 남아 있다. 처음엔 그냥 오래된 책이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펼칠 때마다 손끝에 걸리는 느낌이 묘하게 반복돼서 결국 손을 멈추게 됐다.
중고 서점 어플에서 싸게 올라온 책을 샀다. 표지 상태는 멀쩡했고, 겉포장도 깔끔해서 별생각 없이 결제했다. 배송 받고 처음 넘긴 건 제목이 나온 첫 장이었는데, 글자 주변에 얇게 눌린 듯한 자국이 있었다. 잉크가 번진 건 아닌데, 종이가 한 번 단단히 눌렸다가 풀린 모양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누가 책을 베개처럼 끼워두고 오래 눌렀나?’ 하고 넘겼다. 그런데 다음 페이지도 같았다. 문단이 시작되는 곳마다, 혹은 줄이 끝나는 곳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눌린 모양이 찍혀 있었다. 손바닥으로 책을 덮었다 떼면 생기는 자국 같은데, 그게 모든 페이지에 반복되는 게 이상했다.
처음엔 빛을 비춰 확인해봤다. 각도에 따라 자국이 더 또렷해지는데, 단순한 먼지나 긁힘이 아니라 종이 결이 눌린 흔적에 가까웠다. 더 신기한 건 자국의 모양이 매번 비슷해서, 누르는 부위가 매번 같은 높이로 고정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나는 어쩐지 책을 펼치며 누군가의 손동작을 따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반쯤 넘기자 자국이 더 선명해졌다. 특히 인쇄된 글자 사이로 어두운 선이 스며든 것처럼 보였고, 그 선이 마치 ‘지금 누르고 있다’는 듯한 자세로 이어졌다. 나는 괜히 상상만 커져서, 혹시 누가 책을 펴놓고 뭔가를 숨기듯 눌러둔 흔적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렇다고 누가 뭘 숨길 정도로 비밀스러운 책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교양서였으니까.
그래도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 참고 끝까지 읽으려 했다. 근데 어느 날부터는 같은 문장을 읽는데도 눈이 자꾸 자국 쪽으로 끌렸다. 손가락으로 종이를 쓸어보면, 눌린 부분이 살짝 단단한 느낌이 들었고 종이가 미세하게 꺾여 있는 것 같았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끝으로 살짝 눌렀을 때만 느껴지는 거라 더 소름 돋았다. 책이 반응하는 것처럼 느껴졌달까.
판매자에게 문의를 해봤다. “페이지마다 눌린 자국이 있는데, 혹시 보관 상태가 어떤가요?”라고만 물어봤는데, 답이 너무 빨랐다. “그런 거 없습니다. 사진 보시면 아실 텐데요.” 그런데 내가 캡처해둔 상품 사진을 다시 보니까, 자국이 분명히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사진을 잘 찍으면 보이지 않게 되는 종류의 자국이었고, 그걸 알면서도 그냥 ‘정상’이라고 한 거였다.
그때부터 책이 신경 쓰여서, 구매 내역에 남아 있던 배송 메모를 다시 봤다. 판매자가 적어둔 짧은 문장이 있었는데, “잘 보관하세요. 눌리면 안 됩니다.” 뭐가 웃긴지 모르겠는데, 그 말이 갑자기 전혀 다른 뜻으로 들렸다. 누군가 이미 그 책의 특성을 알고, 그래서 조심하라고 적어둔 것 같았다. 나는 그 문장을 보고도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마지막 장 근처까지 가면 자국이 줄어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촘촘해졌다. 결말로 갈수록 페이지가 두꺼워지긴 하지만, 눌린 모양만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됐다. 마치 책을 펼친 사람이 매번 같은 위치에 같은 압력을 주고 있었던 것처럼. 그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도 책을 닫는 게 두려워졌다. 닫는 순간, 자국이 다시 ‘자리’를 잡고 나를 기다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결국 책을 덮어두고 다른 책을 꺼냈다. 그런데 다음 날, 베개 옆에 놓아둔 그 책을 다시 펼쳤을 때도 자국은 그대로였다. 더 이상 커지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눈에 더 빨리 들어왔다. 아직 누가 눌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 책은 한 번 눌린 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중고거래할 때, ‘표지 상태’보다 ‘열어봤을 때 종이가 어떤 표정인지’부터 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