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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창문 너머로, 내가 떠난 시간보다 늦게 걸어오는 사람

2026-10-23 08:29:11 조회 0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병원 창문 너머로, 내가 떠난 시간보다 늦게 걸어오는 사람. 그날도 나는 같은 통로 같은 냄새에 익숙해질 때쯤, 의자에 앉아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을 세고 있었다. 원래는 검진 받고 집에 가는 게 목적이었는데, 보호자 자리에 누가 대신 앉아줄 사람이 없어서 한 시간만 더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고, 그 “한 시간”이 이상하게 늘어졌다.

나는 2층 외래 쪽 복도를 지나 창문이 보이는 구역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유리창 너머로는 주차장이 아니라 병원 내부 정원 같은 데가 보였는데, 바닥에 물이 고이면 반사된 조명이 길을 이어주는 것처럼 보여. 그때 처음 본 건 누군가의 그림자였어. 창문에 비친 실루엣이 천천히 걷는데, 걸음이 정확히 “내가 방금 막 시계를 확인한 시간”보다 늦게 따라오는 것 같았거든.

처음엔 착각이라 생각했지. 창문에 걸린 반사각이 바뀌면 걸음도 늦게 보일 수 있으니까. 근데 그 사람은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걸어왔어.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는데, 복도에는 나 혼자였고, 직원들도 멀리서 오고 가지도 않았어. 그런데 창문 너머에서만 그 사람이 계속 같은 속도로, 마치 누가 녹화 영상을 재생하듯 걸어오는 거야.

나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봤다. 4시 17분이었어. 그리고 창문 너머의 발걸음이 “4시 17분에 걸어야 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한 건, 정확히 30초쯤 뒤였어. 그 차이가 처음엔 작아서 웃기게 느껴졌는데, 1분쯤 지나니까 불안이 올라오기 시작하더라. 내가 무심코 시계를 또 보려는 순간, 그 사람이 창문에 가까워지며 윤곽이 더 또렷해졌어.

얼굴을 보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유리 너머는 흐릿하게 번졌어. 대신 옷자락 끝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부분만 선명했는데, 색이 옅은 회색이라 딱히 눈에 남는 게 없었거든. 근데 그 회색이, 병원 복도 조명 아래에서 묘하게 차갑게 번쩍이면서 “여기 있어”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떠난 시간보다 늦게 걸어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어.

잠깐,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나? 생각이 꼬이기 시작했어. 보호자라고 했던 사람이 정말 오고 있었는지, 나는 지금까지 통로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시간을 옮겨 담고 있는 건지. 창문 너머의 인영은 정원 쪽 길 끝까지 걸어간 다음, 멈추는 게 아니라 다시 되돌아오기 시작했어. 방향을 바꾸는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아까 네가 본 나”가 아니라 “네가 아직 보지 못한 나”가 막 걸어오는 것 같았거든.

나는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유리창으로 다가가 손바닥을 대 봤어. 차가운 감촉이 손에 닿았는데, 동시에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어. 분명 복도 쪽에서 누가 다가오는 소리였고, 나는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복도 끝에는 아무도 없었어. 그 순간 창문 너머의 인영이 멈춰 서더니, 유리 안쪽을 향해 아주 조금 고개를 기울였어.

나는 그때부터 숨을 억지로 고르게 쉬었어. 혹시 누가 장난을 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이 흔들리는지 확인했는데 내 그림자는 그대로였어. 대신 창문 너머의 인영만 조금씩 늦게 따라오는 느낌이 계속됐어. 내가 팔을 움직이면, 그쪽 인영의 팔도 움직이는데 타이밍이 달라지는 거지. 마치 같은 장면이 아니라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것처럼. 그게 제일 싫었어. “지금”이 아니라 “나중”이 먼저 존재하는 느낌.

검진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정신없이 일어났어. 걸음을 옮기는 순간, 창문 너머 정원 쪽에서 다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게 보였어. 방금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의 동작보다 느렸고, 내가 복도를 벗어나기 시작한 시간보다도 더 늦게 시작됐어. 나는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시선이 창문으로 끌려가더라. 병원은 계속 같은 냄새와 같은 조명으로 굴러가는데, 창문 안쪽의 “나”와 창문 바깥의 “나”가 서로 다른 속도로 걷고 있었거든.

결국 내가 주차장으로 나와 차에 앉아 시계를 확인했을 때, 4시 47분이었어. 내가 병원을 나오는 데 걸린 시간은 30분 정도였는데, 창문 너머에서 그 인영이 정원 길 끝까지 도착하는 게 대략 그쯤으로 보였어. 아까 분명 혼자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부정할 만한 증거는 없었고 오히려 확실한 건 하나뿐이더라. 병원 창문 너머로 걸어오던 그 사람은, 언제나 내가 떠난 다음에야 도착했다는 것. 그리고 그게 자꾸만, 내일도 내 시간보다 늦게 누군가를 데려올 것 같아서… 이상하게 손에서 열쇠가 미끄러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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