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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생의 첫 장보기: 냉장고가 아니라 지갑이 터짐

2026-06-15 00:41:15 조회 14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자취방 계약하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냉장고를 사야 하나?”였는데, 막상 장보기 리스트 쓰려니까 그게 제일 먼저 터질 게 냉장고가 아니라 지갑이더라. 첫 장보기 날, 나는 마트 앞에서 자취생의 당당함을 한껏 장착하고 들어갔다. 문제는 당당함은 결제할 때 사용할 수 없다는 거였지.

처음엔 진짜 알차게 하겠다고 다짐했어. “일단 2주치 식비만 잡자” “반찬은 몇 가지만 돌려 먹자” 이런 식으로 뇌를 설득했는데, 장바구니에 담는 속도가 이미 설득을 이겨버렸어. 계산대 앞까지 걸어가는 동안 내 손은 알아서 움직였고, 나는 그저 “오 이거 자취생이 좋아하는 조합이다” 같은 허세 멘트를 계속 중얼거렸다.

일단 기본템부터 갔지. 쌀이랑 라면, 계란이랑 두부, 그리고 소스류. 여기까진 괜찮았어. 그런데 ‘기본’이라는 단어가 마트에서 얼마나 위험한지 그때 깨달았어. 기본템 코너에서 한 번만 눈 돌리면, “오늘 할인이라서 한 번 사두면 좋을 것 같은 것들”이 줄줄이 눈에 들어와. 마치 내 인생의 선택을 누가 대신해주는 느낌으로 말이야.

특히 냉동식품 코너가 악마의 놀이터였다. 볶음밥, 돈까스, 만두, 파스타, 심지어는 스테이크까지 “전자레인지 5분이면 완성” 같은 문구가 나를 붙잡더라. 나는 자취생이니까 요리가 쉬워야 한다는 논리로 계속 담았는데, 문제는 “쉬운 대신 자주”가 아니라 “쉽게 자꾸”가 되더라. 결과적으로 장바구니에 들어간 건 내 의지보단 편리함이었다.

그날은 채소도 챙기자고 했거든. 샐러드용 야채, 방울토마토, 양배추, 파프리카까지 담았는데, 집에 와서 보니까 생각보다 시간이 안 맞더라. 자취생은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게 아니라,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먹는 존재잖아. 그래서 채소는 냉장고에서 “우리도 곧 먹힐 날이 오겠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고, 나는 그 앞에서 라면을 다시 끓이게 됐어.

여기서부터 진짜 지갑이 터졌던 구간이 나와. 조미료랑 소스, 김치, 그리고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들. 간장, 고추장, 참기름, 굴소스, 올리브오일… 내가 원래 요리 잘하는 사람처럼 말하면서, 사실은 아무것도 몰랐는데 그냥 향 좋은 거랑 브랜드 있는 거 위주로 담아버린 거지. 마트 영수증을 보는데 가격이 점점 하늘로 올라가더라. 나는 분명히 “필요한 것만” 샀다고 믿고 있었는데, 계산은 내 믿음을 무시했다.

그래도 괜찮아, 나는 “한 번에 많이 사면 오래 쓰지”라는 어른스러운 결론을 내렸어. 그런데 집에 와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냉장고는 생각보다 작고 내 구매 욕심은 생각보다 대형이더라. 선반은 이미 소스와 유제품으로 가득 찼고, 채소는 어디 들어갈지 고민하는 상태가 됐어. 결국 냉장고 문이 닫히는 소리도 뭔가 쫓기는 느낌이었고, 나는 그날 처음으로 자취생의 냉장고가 아니라 자취생의 정산이 필요하다는 걸 배웠다.

식사는 어떻게 했냐고? 물론 먹긴 먹었지. 냉동식품은 전자레인지로 해결했고, 계란은 만능처럼 들어갔고, 라면은 마지막에 구원투수처럼 등장했어. 문제는 ‘배치’였어. 내가 계획했던 건 2주치인데, 실제로는 “오늘 먹을 수 있는 걸 먼저 먹고, 다음 날 생각날 때 또 사서 채우는” 식으로 변하더라. 그 과정에서 나는 장바구니를 채우는 손이 아니라, 생각을 뒤늦게 따라오는 머리를 탓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첫 장보기 날의 교훈은 간단했어. 자취는 낭만이 맞는데, 낭만은 계산대에서 잠깐 멈춘다는 거. 그날 영수증을 들고 집에 오는 길에 나는 웃겼어. 분명히 “집에 냉장고 채우자”가 목표였는데, 내 목표는 이미 달성됐더라. 냉장고는 채워졌고, 내 지갑은 비어 있었으니까. 다음번 장보기는 리스트를 더 줄여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이미 다음 할인 쿠폰이 눈에 들어오고 있긴 하다. 그래도 오늘은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잘 버텼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게 또 자취생의 작은 승리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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