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중인데 통화만 하면 자꾸 화장실 얘기 나옴
연애 중인데 통화만 하면 자꾸 화장실 얘기 나와서, 요즘 우리 관계가 ‘대화’가 아니라 ‘배관 관리’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짜로요. 처음엔 그냥 우연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제가 전화만 받으면 상대가 제일 먼저 “나 지금…” 하고 말을 꺼내요. 문제는 그 다음이 늘 화장실이더라고요. 그날도 평범하게 카톡하다가 “통화할까?” 했더니, 전화를 받자마자 “야 나 잠깐만, 화장실 갔다 올게”라고 하더라고요. 전 그 순간에 제 귀가 이상한가 싶었어요.
처음엔 “아 당연하지, 볼일 있으면 가야지” 하고 넘겼죠. 그런데 그게 패턴이 돼요. 통화 시작하면 3분 안에 무조건 화장실 얘기가 나옵니다. 그것도 그냥 “나 잠깐” 수준이 아니라, 상세 리포트가 나와요. 변기 상태는 어떤지, 휴지가 얼마나 남았는지, 손 씻기 세게 해야 하는지. 제가 연애 상담을 받는 건지 위생 점검을 받는 건지 헷갈릴 정도예요. 저는 속으로 ‘우리 둘이 지금 사랑 얘기 하려고 전화한 거 맞지…?’ 이러고 있는데, 상대는 태연하게 계속 설명해요.
그래서 한 번은 진지하게 물어봤어요. “혹시 너, 통화하면 장이 왜 그렇게 바빠져?”라고요. 그랬더니 상대가 되게 당황한 표정으로 “아니 나 진짜 우연인데…” 하더라고요. 근데 그 우연이 한 주에 한 번이 아니라, 거의 매 통화마다 반복되니까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꾸준해요. 그날 통화 끝나고 나서도 계속 생각났어요. 혹시 전화 연결되는 순간 뇌가 ‘화장실 모드’로 전환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그래서 제가 다음 통화 때는 아예 “오늘은 화장실 얘기 안 해도 돼”라고 미리 선포했죠.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선포 다음부터 더 교묘하게 나와요. “나 지금 밖이야” 하면서 시작하더니, 30초 후에 “어… 잠깐만, 화장실 찾는다”로 넘어가는 거예요. 밖에 있어도 통화가 되면 결국 결론은 같은 곳. 심지어는 “화장실 얘기 하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같은 소리까지 하니까, 그건 이미 본인도 통화의 흐름을 장악 못하고 있다는 뜻 같더라고요. 저는 그 말 듣고, 그냥 웃긴데 한편으로는 좀 불안했어요. 이 사람이 내 마음을 보러 온 건지, 내 심리를 점검하러 온 건지.
처음엔 제가 ‘대충 넘어가야지’ 모드였는데, 어느 날부터는 제가 스스로를 테스트하기 시작했어요. 상대가 화장실 얘기할 타이밍에 맞춰서, 일부러 다른 질문을 던져보는 거죠. “오늘 뭐 먹었어?” “너 요즘 기분 어때?” “우리 이번 주에 뭐 할까?” 이런 거요. 근데 질문이 뭐든, 상대는 꼭 마지막에 “근데 나 화장실 가야 해서…”로 마무리돼요. 진짜로 대화의 종결자가 화장실이에요. 저도 모르게 문장이 짧아지더라고요. 제가 “그래 알겠어” 하고 끊으면, 상대는 또 “아 근데 하나만 더…” 하고 다시 화장실 관련 디테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전략’을 바꿨어요. 통화할 때마다 제가 먼저 화장실을 주제로 꺼내서 분위기를 선점하는 방법. 처음엔 이게 통할 줄 알았죠. 제가 “나 오늘 변기 물 내리는 소리도 들었어” 같은 농담을 던졌더니, 상대가 “오 진짜? 너도 그래?” 하면서 반응이 오더라고요. 그러더니 다음 말이 더 충격이었어요. “너도 그러면 우리 그냥… 통화하면 장이 안전한지 체크하는 커플인가 봐”. 이게 무슨 과학 실험도 아니고, 관계를 ‘기능’으로 규정하는 순간부터 웃음이 나오면서도 뭔가 마음이 묘하게 이상해졌어요.
그런데 웃긴 건, 화장실 얘기를 하면서도 정작 상대의 감정이 엄청 솔직해지는 거예요. 화장실 얘기가 시작되면 보통 잡다한 정보가 나오는데, 그게 끝나고 나면 꼭 “근데 너 목소리 들으니까 좀 덜 예민해졌다” 같은 말이 따라붙어요. 그러니까 화장실이 주제가 아니라, 화장실 얘기를 하면서 긴장을 풀고 있는 거 같기도 해요. 저도 그때 깨달았죠. 이 사람은 뭔가 불안을 감추려고 농담을 던지는 타입이구나. 근데 그 농담의 소재가 화장실인 거예요. 그래서 저는 요즘 그냥 반응을 바꿨어요. “응 알겠어, 잘 다녀와” 하고 기다려주면, 다시 돌아와서 대화가 더 편해져요.
문제는 그 ‘편함’이 화장실 얘기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리듬을 맞춰줘서 생긴 것 같다는 점이죠. 그래서 제가 요즘 통화 전에 은근히 예열합니다. “오늘 통화는 10분만 하고, 마지막엔 우리 계획 얘기하자” 이런 식으로요. 그러면 상대가 중간에 화장실을 언급하긴 해도, 결국 마지막에는 꼭 “아 맞다 우리 저녁에 뭐 먹지?”로 돌아와요. 그리고 가끔은 화장실 얘기 하다가도 스스로 웃겨서 “나 또 시작했네” 하고 혼자 빵 터지더라고요. 저는 그 순간마다 마음속으로 박수를 쳐요. 본인이 인지라도 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결론은 이거예요. 우리 커플은 연애하면서 통화하면 사랑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정작 연결되는 건 화장실 소식이 먼저더라고요. 대신 화장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이상하게도 더 달콤해져요. 그래서 이제 저는 아예 통화할 때마다 스스로 다짐합니다. “오늘도 먼저 화장실 얘기 나오면, 그건 무슨 의심이나 문제 신호가 아니라… 우리 둘이 대화 시작 버튼을 누르는 방식이구나.” 그러다 언젠가 화장실 얘기가 안 나오면, 오히려 제가 먼저 “야, 너 오늘 설마… 괜찮아?” 하고 놀랄 것 같아요.
근데 그날이 오면, 그때는 아마 우리 둘이 정말로 ‘사랑 얘기’만 하게 되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