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할 때마다 내가 잊는 걸 상대가 기억함
연애할 때마다 내가 잊는 걸 상대가 기억함. 진짜 이게 “내가 서운할 만큼 못 챙긴다” 수준이 아니라, 아예 타이밍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계속 반복됐어요.
처음엔 그냥 내가 둔한가 싶었죠. 예를 들면 약속 장소, 내가 했던 말, “다음 주에 이거 사야지” 같은 사소한 계획들. 나는 다 머릿속에서 증발하는데, 상대는 대화 끝나기도 전에 이미 노트 정리하듯 받아 적어둔 사람처럼 툭툭 꺼내더라고요.
연애 1년차 때였나, 커피 사러 가면서 “내가 원래 라떼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요즘 괜찮아졌다”라고 말했는데, 두 달 뒤에 카페에서 상대가 갑자기 “오늘은 그때 말한 ‘괜찮아진 라떼’ 느낌으로 가자” 하더니 메뉴 추천을 딱 그 톤으로 해줬어요. 저는 그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고요. 그 순간 속으로 ‘나 지금 상담 받는 중인가?’ 싶었습니다.
또 한 번은 생일 얘기. 저는 생일이 다가오면 대충 “어, 곧이네” 하고 넘기는데, 상대는 제가 한 번 흘린 말에서 선물 조건을 뽑아내요. “난 포장지 뜯는 거 귀찮아”라고 한 적 있는데, 그 다음 해에는 쇼핑백도 없이 그냥 종이 한 장으로 감싸서 오더라고요. 제가 포장 뜯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아차렸다는 게 아니라, 이미 ‘내 성향’으로 기억하는 느낌이라 괜히 감동+당황이 같이 왔어요.
그런데 더 웃긴 건, 저희 둘 다 말로는 별일 없던 날들이거든요. 제가 술 마시고 집에 가는 길에 “아 맞다, 내일 아침에 빵 사갈까” 같은 생각을 흘려버리면, 다음 날 아침에 문 앞에 빵 봉지가 놓여 있는 식이죠. 제가 그걸 말했는지조차 확신이 안 드는데, 상대는 “어제 그 말 했잖아”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웃어요. 저는 기억을 못 해서 멘탈이 흔들리고, 상대는 기억을 해서 여유가 있고, 그게 또 너무 반복되니까 어느 순간 제가 못 잊는 쪽이 이상해 보이기 시작해요.
연애 중에 제가 자꾸 “지난번에 어디 가자고 했던 거”를 까먹으면, 상대는 날짜까지 정확히 말해요. “그때 너 ‘여기 사람 없을 때 가야 해’라고 했잖아. 그리고 주차가 편한 쪽으로 가자고 했고.” 저는 그 말의 존재가 머릿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데, 상대는 마치 캘린더 앱 열어놓은 것처럼 줄줄 읊습니다. 이쯤 되면 저는 상대가 제 기억을 훔쳐오는 게 아니라, 상대가 제 머릿속에 미리 메모를 심어둔 느낌이랄까요.
문제는, 그런 기억들이 단순히 챙김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상대는 제가 잊는 걸 기억하면서도, 그걸로 잔소리를 안 해요. “너 또 잊었네”가 아니라, “너는 이런 걸 좋아할 때가 있더라”로 연결해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반대로 조심하게 돼요. 내가 또 흘려버린 말이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구나, 그리고 그 중요한 걸 상대가 기억해주고 있다는 걸 제가 뒤늦게라도 알아차리게 되니까요.
물론 한 번쯤은 따져보고 싶더라고요. “너 왜 그렇게까지 기억해?” 했더니 상대가 하더라고요. “너가 말하는 건 결국 ‘지금 너의 기준’이잖아. 나는 그 기준이 사라지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 거지.” 이 말 듣고 나니까 좀 웃겼어요. 저는 말의 의미를 대충 흘려보냈고, 상대는 그 흘림을 자료로 보고 있었던 거잖아요.
그래서 결론은 뻔합니다. 제가 연애할 때마다 잊는 걸 상대가 기억하는 게 아니라, 사실 상대는 제 속도를 따라오는 게 아니라 제 옆에서 제 기록을 대신 읽고 있었던 거예요. 지금도 누가 그러더라구요, “너는 왜 매번 잊어버리는데도 관계가 이어져?” 저는 그럴 때마다 대답합니다. “아, 나 잊는데 상대가 기억해. 근데 그 사람도 결국 언젠가 피곤해지겠지. 그래서 나도 이제는… 내 달력 좀 열어보려고요.” 그리고 그 말 하고 다음 주가 되면 또 잊습니다. 그럼 또 누가 기억해주겠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