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기획안 제출했는데 제목만 바뀌어서 돌아옴
회사에서 기획안 제출했는데 제목만 바뀌어서 돌아옴. 진짜 제목만 바뀌고 내용은 거의 그대로라, 읽는 순간부터 “아, 나 이거 복붙 당했구나” 감이 왔어요.
처음엔 제가 흥분했죠. 자료 정리하고 도표 몇 개 새로 만들고, 고객 인터뷰 요약까지 넣어서 꽤 공들였거든요. 그날 오후에 팀장님께 “이번엔 좀 다르게 가보겠습니다”라고 보내고, 마음속으로는 이미 결재 라인 통과하는 상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메일함에 제 기획안이 “회사용 버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도착했어요. 제목만 바뀌었더라고요. 저는 그 순간부터 눈이 멈췄습니다. 제 제목을 그대로 살리면서 끝에 한 단어만 붙여서 돌아온 느낌? ‘기획안’이라는 단어는 그대로고, 핵심 키워드도 동일하고, 심지어 첫 페이지에 적힌 제 담당자명까지 그대로였어요.
더 황당했던 건 목차 구성도 똑같다는 거예요. 저는 “이건 내가 만든 구성인데?” 싶어서 페이지 번호까지 확인했거든요. 상대가 수정했다고 하면 최소한 흐름이라도 바뀌어야 하는데, 줄바꿈 위치랑 그림 캡션 순서까지 거의 동일하더라고요. 제가 넣었던 “문제 정의” 파트 다음에 “해결 방향”이 오는 그 순서가 그대로였어요.
그래서 바로 댓글로 물어볼까 하다가, 괜히 시비 걸리면 제 일이 더 커질 것 같아서 참았습니다. 대신 메모를 훑어보는데, 수정 흔적이란 게 딱 두 군데더라고요. 하나는 문장 하나에 “현재”를 “당장”으로 바꾼 정도. 다른 하나는 제가 강조한 KPI 수치 표에서 단위를 바꾼 수준. 내용의 뼈대는 그냥 제가 만든 그대로였습니다.
팀장님은 회의에서 “좋은 방향인데 제목을 더 임팩트 있게”라고 하셨대요. 그 말을 저는 메일을 받고 나서야 이해했어요. 이 회사에서는 전략이 아니라 제목이 핵심이고, 임팩트는 내용이 아니라 파일명에서 나온다는, 그런 은근한 철학이요. 제가 기획안을 만들면서 “이 부분은 꼭 설득 포인트로 써야 한다”라고 적어둔 문장이 전부 그냥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그래도 웃긴 건, 반려 메일에는 친절하게도 “좋습니다. 조금만 더 손봐주세요”라는 문장이 있었거든요. 여기서 ‘조금’이란 게 정확히 무엇인지 감이 안 와서, 저는 결국 다시 작업을 시작했어요. 제목에 맞춰 문장 톤을 정리하고, 도표 레이블도 새로 붙이고, 결론 파트는 더 단단하게 다듬었습니다. 이번엔 진짜 손봐서 “이번 버전은 다르다”라고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결과는 또 기가 막혔습니다. 이번엔 제목이 또 바뀌어서 돌아왔는데, 바뀐 제목이 이번엔 아예 저의 첫 제목을 거의 그대로 품고 있더라고요. 제가 생각했던 “새로 만든 설득”은 어디 갔는지, 문장 대부분은 첫날 제가 작성한 내용이랑 동일했습니다. 제가 새로 넣은 문단은 중간에 흔적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다 이전 버전 그대로였어요. 마치 제가 밤새 만든 게 아니라, 누가 잠깐 스캔해서 저장만 해둔 것 같은 느낌이었죠.
마지막으로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회사에서는 기획안이 “완성”이 아니라 “제목의 생존”을 먼저 하는 게임이라는 걸요. 제목은 매번 살아남고, 본문은 늘 같은 자리에 머물고, 결재는 결국 사람 마음이 결정한다는 걸요. 그래서 지금은 기획안을 제출할 때 제목을 두 가지 버전으로 준비해요. 하나는 ‘진짜 내 마음대로’ 버전, 하나는 ‘받아도 안 죽는’ 버전. 그래도 어쩌겠어요, 어차피 돌아올 거면 제목이라도 제가 선택하자는 거죠.
결국 그날 회의에서 팀장님이 한 말이 저한테는 제일 크게 남았어요. “다음엔 제목에 맞게 내용도 더 임팩트 있게 가보자.” 그때 저는 조용히 웃었어요. 이미 내용은 제가 임팩트 있게 만들어놨는데, 돌아온 건 제목뿐이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회사 기획안의 정답은 하나예요. 제목은 바꿔도, 내용은 안 바뀌어도, 결국엔 다시 ‘제목’ 얘기만 나온다. 이게 바로 회사의 전통… 아니, 룰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