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행사에서 내 컵만 자꾸 없어짐
가족 행사 날만 되면 이상하게 제 컵이 먼저 사라집니다. 정확히는 “내가 안 쓰는 시간에”요. 저는 설거지 담당도 아니고, 술잔을 따로 가져가는 타입도 아닌데, 거실 탁자에 잠깐 놓아둔 제 컵이 어느 순간부터 행방불명이 돼요. 처음엔 설거지하다가 옮겨졌겠지, 하고 넘어갔는데 올해는 또 그 패턴이 반복되더라고요.
이번에도 시작은 똑같았습니다. 명절처럼 큰 행사였고, 다들 각자 역할이 있어서 저는 그냥 손님처럼 앉아 있다가 물 마시려고 제 컵을 찾았어요. 그런데 그 컵이 보이는 순간은 늘 “처음 딱 한 번”뿐입니다. 저는 컵에 손잡이 달린 흰색 머그를 쓰거든요. 제 손에도 익었고, 물맛도 그게 제일 편해서 늘 그걸로 고정인데, 오늘은 분명히 제 자리 옆에 둔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식탁이 바빠지면서 어른들이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잖아요? 반찬 옮기고, 국 뜨고, 누가 어디 앉았는지 확인하고… 그 사이에 컵이 쑥 사라집니다. “혹시 누가 설거지 바구니에 넣었나?” 싶어서 주방 쪽을 봤더니, 바구니 안에는 다른 컵들만 있더라고요. 제 컵은 안 보이고요. 저는 속으로 ‘아 이번엔 그냥 제가 못 본 거겠지’라고 정리하려 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에요.
식사 다 끝나고 다들 커피나 차를 마실 때가 됐는데, 그때부터 우리 집의 컵 전쟁이 시작됩니다. 제가 물을 더 마시려 하니까 또 컵이 없어요. 그러면 보통은 “누가 가져갔어?” 같은 말이 나와야 하는데, 놀랍게도 다들 태연해요. 누군가는 “여기 컵 많지 않냐?” 하고, 다른 사람은 “아 그건 누가 씻어놨어” 하고 웃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 ‘누가’가 늘 같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번엔 증거를 남기기로 했습니다. 손잡이 부분에 작은 스티커를 붙였거든요. 아주 티 안 나게, 하지만 제가 보면 바로 알아볼 정도로요. 그리고 일부러 컵을 제 앞에 두고, 어른들이 지나갈 때도 “이거 제 거예요”라고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티를 내면 또 누가 장난칠까 봐요. 대신 컵이 사라지는 타이밍을 관찰했죠.
관찰 결과는 참 명확했어요. 반찬을 다들 가져가고 나서, 누군가가 제 컵 바로 옆을 지나가는 순간 컵이 ‘이동’하더라고요. 누가 가져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는데요. 다음 순간 탁자 위에는 멀쩡한 컵이 남아있고, 제 컵만 없어요. 제가 속으로 “설마 다시 바구니로?” 하고 주방을 가면, 이번엔 컵이 아예 다른 데서 나와요. 거실 한쪽에서 TV 보시는 분 앞에서요. 그분은 제가 평소에 잘 챙겨주시는 어른인데, 문제는 그분이 제가 쓰는 컵을 ‘따로’ 고르듯이 들고 계신다는 거예요.
제가 조심스럽게 “어르신, 혹시 제 컵 아니에요?”라고 물어봤더니 그때서야 웃으시면서 “아, 이거는 그냥 편해서요. 손잡이 잡기 좋더라” 하시는 겁니다. 저는 그 말 듣고 순간 멈칫했어요. 편해서요? 저도요. 손잡이 잡기 좋은 컵이면… 제가 쓰는 컵이 맞잖아요. 그런데도 가족들 반응이 너무 자연스러워요. 어떤 사람은 “또 그 컵 뺏겼네” 하고 농담을 던지고, 어떤 사람은 “가족은 돌려쓰는 거지”라면서 제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요.
결국 저는 마지막 카드로 ‘제 컵 위치 고정’이라는 전략을 씁니다. 컵 밑에 작은 종이를 깔아서 바닥과 붙는 느낌이 나게 했고, 컵 옆에 제가 좋아하는 물티슈를 딱 하나 같이 둬요. 이러면 누가 봐도 제 동선이라는 뜻이 되잖아요. 그런데 식사 후, 제가 화장실 다녀오는 사이에 또 없어졌습니다. 제가 돌아오자마자 제 자리에 종이만 덩그러니 남아있고요. 물티슈도 같이 사라졌더라고요. 그 순간 깨달았어요. 제 컵은 단순히 “누가 들고 옮기는 물건”이 아니라, 가족 행사에서 벌어지는 “어딘가로 이동되는 밈”이라는 걸요.
그래서 결론은 이겁니다. 우리 집은 컵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제 컵이 자발적으로 배달되는 시스템이에요. 누군가가 편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 컵이 ‘더 필요한 곳’으로 이동하는 거죠. 저는 컵을 찾다가 어른들 앞에서 서로 눈치게임만 하느라 물 마시는 타이밍을 계속 놓쳤고, 결국 당일 물 대신 탄산을 마시게 됐습니다. 근데 탄산 컵도 한 번 쓱 옮겨지더라고요. 그날 이후로 저는 그냥 마음을 놓았습니다. 물은 어디서든 마시면 되니까요. 다만… 제 컵만은 행사 끝나고 꼭 한 번은 다시 제 손에 돌아오는데, 그때마다 정말 기분이 묘해요. 누가 가져갔다가 다시 돌려놓을 때, 제 컵은 이미 ‘가족 공용 텐션 아이템’이 돼 있거든요. 다음 명절엔 제가 먼저 제 컵을 들고 나타나서, 조용히 이렇게 말하려고요. “저는 오늘도 컵을 쓰겠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먼저 쓰고 와도… 저는 웃고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