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 냉장고에 누가 ‘비상용’ 음식을 넣어둠
자취방 냉장고에 누가 ‘비상용’ 음식을 넣어둠. 처음엔 뭔가 귀엽게 챙겨둔 건가 싶었는데, 냉장고 문 열자마자 그 정체가 딱 보이더라. 작은 박스 하나가 가운데에 딱 자리 잡고 있었고, 위에 굵직한 글씨로 “비상용”이라고 적혀 있었음. 그 순간부터 내 냉장고가 갑자기 재난 대비 시설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누가 실수로 가져다 놓은 거라 생각했어. 근데 박스 옆에 붙어있는 쪽지가 너무… 확신에 차 있었어. “본인 외에는 열지 마세요. 위급 상황 시에만 사용 바랍니다.” 위급 상황이 뭔지 범위가 넓고, 문장 끝까지 예의 바르게 단정해서 더 찝찝했지. 내가 위급하면 내 냉장고가 아니라 내 멘탈을 먼저 확인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박스 뚜껑을 열어볼까 하다가 일단 참았다. 왜냐면 자취방 냉장고는 원래 내 삶의 잔재들이 들어있는 곳이잖아. 거기 타인의 규칙이 끼어드는 순간, 내 하루의 주도권이 슬쩍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간 느낌이 들거든. 대신 사진을 찍어두고, 관리실에 전화할까 말까 고민하면서 냉장고를 계속 열어보게 됐다. 사람은 이상한 걸 보면 자꾸 확인하고 싶어지더라.
다음 날, 진짜 ‘비상’ 같은 일이 생겼다. 내가 장을 안 보고 사흘을 버텼거든. 배는 고픈데 냉장고엔 달랑 반찬통 두 개랑 음료수만 있었어. 그래서 평소처럼 조리해 먹으려다, 그 “비상용” 박스가 눈에 들어오는 거야. 솔직히 말하면 참다가 결국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 이겼지. 위급 상황이 아니면 뭐가 위급이냐, 배고픈 건 그냥 위급 아닐까 싶더라.
박스를 열어보니 정체가 나왔는데, 구성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 라면 몇 개, 소스류 작은 병, 그리고 빵처럼 보이는 것들. 근데 문제는 포장이 너무… 과하게 진지하다는 거야. 라면은 “불안정한 시기용”이라고 적힌 종이로 감싸져 있고, 소스는 “상황 안정 전까지는 소량만”이라고 체크박스가 있는 메모가 붙어 있었어. 체크박스가 있으면 왠지 이건 내 선택이 아니라 어떤 평가 시스템에 내가 참여하는 느낌이 들더라.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쪽지를 읽어보게 됐어. 쪽지에 누가 봐도 ‘주인’처럼 말투가 딱 잡혀 있었거든. “나중에 필요할 때 쓰세요. 저는 지금 사용하지 않아서요.” 이 문장 하나가 너무 애매했어. 지금 사용하지 않는데, 왜 냉장고에 넣었지? 넣는 사람이 본인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선의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선의”라고 하기엔 메모가 너무 규정 같아.
그때부터 이상한 상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어. 혹시 이전 세입자가 놓고 간 건가? 아니면 같은 층 사는 사람이 몰래 챙겨준 건가? 근데 몰래 챙긴다기엔 너무 티가 나는 라벨링이 있었고, 반대로 이전 세입자라면 왜 지금 들어와서 냉장고 한가운데에 “비상용”을 박아두겠어. 나는 자취방에서 흔히 겪는 ‘소소한 미스터리’의 문턱을 넘어, 거의 추리 드라마의 관찰자 모드가 됐다.
결국 참다 못해 내가 그 박스에 적힌 날짜를 확인했어. 날짜가 적혀있긴 했는데, 애매하게도 “다음 주”라고만 적혀 있었어. 보관 방법도 “필요하면 드세요” 같은 말로 뭉뚱그려져 있고, 유통기한은 “기분 좋을 때까지” 같은 문구가 들어가 있더라. 웃기긴 했는데, 이쯤 되면 진짜 궁금해졌어. 누가 냉장고를 기분 관리용으로 만들어버린 거지? 내가 지금 냉장고를 열면서도 내 감정이 같이 조절되는 느낌이었어.
그래서 나는 최후의 선택으로, 그 쪽지 옆에 내가 짧게 한 줄 붙여뒀어. “저도 비상하면 연락드릴게요. 제 비상은 보통 배고픔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는 냉장고를 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지. 이상하게 누군가가 내 생활을 은근히 감시하는 기분이 들면서도, 동시에 누가 나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않았겠구나 싶기도 하더라. 결국 자취라는 게 혼자인데, 혼자만의 규칙만 있으면 너무 팍팍하잖아.
며칠 뒤, 누가 실제로 답장을 붙여놨더라. “배고픔 비상 인정합니다. 단, 비상용은 비상시에만요(웃음).” 그리고 그 아래에 작은 메모 하나 더. “그리고 오늘은 제가 넣은 게 아니에요. 저번에 택배 잘못 넣고 다시 찾다가… 그게 남았나 봐요.” 그제야 알겠지. “비상용”은 누가 나를 돕겠다는 의지라기보다, 누군가의 실수와 급한 수습이 만든 레전드였던 거야. 그래도 나는 그날 이후로 냉장고 문 열 때마다, 내 삶이 한 번은 재난 대비 시스템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기분으로 웃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