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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 거래할 때만 유독 말투가 정중해짐

2026-06-28 05:41:11 조회 0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당근 거래할 때만 유독 말투가 정중해짐. 진짜 신기한 게, 일상에서는 반말도 잘 치고 친구들한텐 “아 그냥 해~” 이러면서도, 당근 켜는 순간부터 제가 갑자기 공문서 읽는 사람처럼 변하더라고요.

처음엔 그냥 기분 탓인 줄 알았어요. 중고 노트북 하나 올렸는데 누가 “구매하고 싶습니다. 상태 어떤가요?” 이런 식으로 메시지 오더니, 저도 모르게 “네, 안녕하세요! 사진은 최대한 자세히 올려두었고요, 배터리 성능은 체감상 양호합니다.” 하고 답장을 길게 써버린 거예요. 제가 원래 말투가 저렇진 않은데요… 제 손가락이 먼저 예의를 차렸음.

그 다음부터는 진짜 본격적으로 정중 모드가 켜져요. 물건 문의가 오면 “몇 번 쓰셨어요?” 같은 질문에도 “사용 횟수는 총 3회이고, 이동은 케이스에 넣어서 조심히 했습니다.” 이런 문장으로 답하는데, 그러고 나면 뒤늦게 “왜 내가 이걸 군복무 보고서처럼 썼지?” 싶더라고요. 근데 이미 보냈으니 되돌릴 수가 없죠. 당근은 취소 버튼이 아니라 성실함 버튼만 있는 느낌이에요.

특히 웃긴 건, 채팅이 길어질수록 더 과해진다는 거예요. “직거래 언제 가능하세요?” 물으면 “가능하신 시간대가 있으실까요? 저는 평일 저녁 7시 이후와 주말 오전에 연락 가능합니다.” 이렇게 써놓고, 마지막에 꼭 “감사합니다”를 붙입니다. 이게 자동으로 붙는 거라니까요. 저는 평소에 감사하다는 말을 그렇게 자주 안 하는데, 당근에서는 제가 감사 담당자가 된 기분이에요.

그리고 물건 상태 설명을 할 때, 저는 갑자기 소설가가 됩니다. 스크래치 하나 있어도 “생활 사용감은 있으나, 눈에 띄는 큰 파손은 없습니다.” 같은 문장을 만들고, 배터리도 “완충 후 기준으로 보통 사용 시 무난합니다.”라고 말해요. 심지어 “충전기 포함인가요?” 같은 질문엔 “네, 구성품으로 충전기 같이 드립니다.”라고 또박또박 답하면서도 마음속으론 “이 사람은 심사를 하는 공무원인가?” 싶어요.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은 만남 직전이에요. 장소 정하고 시간 맞춰서 “그럼 6시 30분에 역 3번 출구에서 뵐게요!”라고 보내면, 상대도 “감사합니다. 도착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러잖아요. 둘이서 서로 예의 모드로 대화하다가 막상 만나면, 똑같이 “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만 하고 물건은 서로 눈치 보며 건네요. 웃긴 게, 거래가 성사되는 순간까지 우리는 엄청 공손한데, 막상 물건은 그냥… 박스에서 꺼내 건네는 거예요. 인간관계가 아니라 배송 완료 체크리스트 같아짐.

제가 이 정중함에 중독된 게, 한번 고조되면 다음 거래도 똑같이 시작해버려요. 예를 들어 집에서 안 쓰는 선풍기 올리면, 상대가 “혹시 리모컨 있나요?” 이렇게 보내는데요, 저는 “네, 리모컨 있습니다. 그리고 작동도 이상 없이 됩니다.”라고 답하고 바로 “혹시 추가로 확인 원하시는 부분 있으실까요?”를 붙여요. 왜 굳이 ‘추가로’까지 묻는지 모르겠는데, 그게 습관처럼 붙어요. 그러다 보면 상대가 “아 네 감사합니다. 딱 필요한 것만 있어서요” 이렇게 답해주는데, 그 순간 제가 오히려 더 죄송해져요. 제가 필요한 것보다 더 친절해진 걸 느끼니까요.

그래도 가끔은 제가 일부러 과하게 예의 차리는 건가 싶을 때가 있어요. 어떤 분이 “가격 협의 가능할까요? 부담되지 않으면 구매할게요”라고 메시지 보냈는데, 저는 “네, 협의 가능합니다. 부담스럽지 않게 조정해보겠습니다.” 하고 답했더니, 상대가 “아 너무 친절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이러는 거예요. 저는 사실 협의가 가능한지부터 확인해야 했는데, 이미 말투가 친절한 사람으로 고정되어 버린 거죠. 당근은 말투가 신분증처럼 작동하는 듯해요.

결국 제 결론은 이거예요. 당근에서는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서로의 불안을 예의로 포장하는 게임을 하는 거 같더라구요. 상대도 혹시나 실수할까 봐 조심하고, 나도 혹시나 손해 볼까 봐 조심하고. 그래서 말투가 갑자기 정중해지고, 감사가 늘고, 문장도 길어지고요. 그래서 오늘도 저는 새로운 물건을 올리면 또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문의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제 자신을 보고 빵 터져요. 제가 제일 예의 바른 사람인 건지, 아니면 당근이 저를 예의 미션에 강제로 넣는 건지. 어쨌든 거래는 되니까, 내 말투가 변하는 것도 꽤 괜찮은 서비스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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