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내 번호로 ‘엄마 대신 전화’ 해버림
가족이 내 번호로 ‘엄마 대신 전화’ 해버린 날이 진짜 레전드였다. 나는 그냥 평소처럼 휴대폰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계단 내려가는 소리도 없이 전화벨이 울리더니 “어, 너 엄마 대신 전화받아줄 수 있어?”라는 목소리가 들린 거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음. 내 번호는 내가 쓰는 건데, 왜 갑자기 엄마의 번호 대체자가 된 느낌이지?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네? 엄마가 누구한테…?” 이렇게 되묻는 순간, 상대는 내 가족 중 한 명이었고 너무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가서 더 어이없었다. “아니야, 엄마 지금 회의 중이야. 급한데 너 번호로 연락 좀 받으라고 했잖아.” 이 말이 끝나자마자, 통화는 ‘설명’이 아니라 ‘업무 전달’ 모드로 전환됐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아무도 그런 얘기 안 했는데요”라고 겨우 말했더니, 상대는 “그럼 네가 엄마 대신 전화를 하게”라고 태연하게 마무리함.
문제는 그 뒤부터 시작됐다. 가족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까 이미 분위기가 정해져 있었다. 어떤 사람은 “엄마가 오늘 정신이 없어서요~”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너는 항상 연락 빠르니까 엄마 라인 맡아줘” 같은 말까지 붙여놨더라. 여기서 더 웃긴 건, 그게 단 하루짜리 사건이 아니라 “이미 며칠 전부터 그렇게 해왔다”는 분위기였다는 거다. 나는 그걸 오늘에서야 ‘현장 발령’처럼 통보받은 셈이었다.
그래도 나는 설마 하고 ‘진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한테 전화 돌린 거 누구야?”라고 물었더니 엄마가 한 박자 쉬고 말하더라. “아니… 내가 누굴 돌린 적이 없는데? 너한테는 너 일로 바쁘지 않게 연락하라 했지.” 그러자 나는 머릿속에서 “그럼 내 번호로 왜 전화가 와?”라는 질문만 계속 회전했다. 결국 엄마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모르는 상태였고, 그 순간부터 나는 범인을 추적하는 사람처럼 가족 통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근데 범인은 생각보다 가까운 데 있었다. 아빠한테 물었더니 “나? 난 그런 지시 안 했어. 그건 네가 알 거라고 생각했지.” 이런 식으로 말이 흘렀고, 내 쪽은 점점 ‘엄마 라인 담당자’가 아니라 ‘가족 시스템의 빈칸을 메우는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결국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했던 건 ‘항의’가 아니라 ‘정확한 확인’이었다. “엄마가 지금 회의 중인데 내가 왜 전화받는 역할을 해야 해?”라고 했더니, 가족들은 한 명씩 돌아가며 “너 착하잖아” “너는 전화 잘 받잖아” “그냥 네가 받으면 되잖아”라고 말하더라.
이게 진짜 웃긴 게, 가족이 ‘의도적으로’ 나를 속인 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엄마가 힘들대” “엄마가 말해뒀다던데” 같은 말을 전해주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사실처럼 굳어버린 거다. 말하자면, 가족 내부에서 ‘구두 전설’이 전염된 셈. 그러다 보니 내 번호는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직접 쓰는 번호”가 아니라 “엄마를 대신하는 개념”이 돼버린 거다. 내가 본 건 통신 오류가 아니라, 가족의 신뢰 시스템이 자체적으로 진화한 현장이었음.
그날 이후 나는 ‘엄마 대신 전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됐다. “누가요?” “어디서요?” “언제요?” 그러면 가족들은 대부분 잠깐 멈칫했다. 왜냐하면, 정확히 누가 지시했는지를 따지면 다들 말문이 닫히는 순간이 오거든. 그때마다 나는 내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앞으로 엄마 대신 전화해야 할 일이 있으면, 최소한 엄마가 직접 저한테 확인해요. 아니면 단톡방에 ‘엄마 대신’이라고 공지라도 붙이든가요.” 그러니까 그제야 다들 “아 맞다, 그걸 안 했네” 같은 표정이 됐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가족들은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보다, 내가 그 역할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전화가 줄어든 건 사실인데, 대신 단톡방에서 이상한 문구가 하나씩 붙기 시작했다. “우리 이제 연락은 OO(내 이름) 통해서만요~” 같은 식이었다. 어? 내가 거절했는데 왜 더 확정이 되는 분위기지? 결국 나는 ‘담당자’가 아니라 ‘공식 유통 경로’가 되어버렸다. 가족은 거절을 받아들이는 대신, 거절을 새로운 규칙으로 바꾸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결말은 예상보다 조용했다. 어느 날 엄마가 “야, 너 요즘 전화 많이 받더라. 그거 좀 그만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하더라. 그 말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나는 “엄마가 그런 거 한 적 없다고 하니까, 이제 정리해도 되죠?” 했더니 엄마가 웃으면서 “정리하면 되지. 근데 누가 그렇게 돌렸는지 알아내는 건, 너 몫이야.”라고 하더라. 그래서 지금도 나는 가끔 전화 오면 화면을 보면서 조용히 생각한다. ‘이번엔 누가 또 나를 엄마로 착각했지?’ 하고. 가족의 ‘착각’이야말로 우리 집 운영체제의 핵심 기능이라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웃기면서도, 다음 달엔 또 무슨 업데이트가 들어올지 은근히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