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에 냄비가 늘어나는데 내 기억엔 하나도 없음
자취방에 냄비가 늘어나는데 내 기억엔 하나도 없음. 진짜로… 오늘도 장을 보는데 “아 이건 내가 산 거였나?” 싶은 게 아니라, “내가 산 냄비가 맞긴 한가?” 싶은 상황이 자꾸 생겨요. 제가 분명히 냄비는 하나만 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부엌 쪽이 마치 주방 용품 매장처럼 변해가더라고요.
처음엔 그냥 착각인 줄 알았어요. 이사할 때 박스에 뭐가 들어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자취 시작하면 물건이 늘어나는 건 당연하니까요. 근데 며칠 전부터 “아니, 이 냄비는 처음 보는 모양인데?” 하는 순간이 딱 와요. 뚜껑 손잡이 모양이 다르고, 바닥에 찍힌 스티커가 완전 새 거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제일 먼저 스스로를 의심했죠. 주말에 청소하면서 냄비를 한 번씩 닦아보는데, 기름때가 묻어있는 정도나 열감 자국이랑 느낌이 “최근에 썼다” 쪽이더라고요. 제가 요리 자주 안 하는 편이라서, 설령 산 거라면 최소한 사용 흔적이 제 생활 패턴이랑 비슷해야 하잖아요. 근데 냄비들은 전부 제 패턴이 아닌 것처럼, 누군가가 계속 써온 것 같았어요.
일단 정신 차리고 확인 절차 들어갔습니다. 계좌 내역을 뒤져봤는데 냄비 살 만한 결제는 없어요. 배달 앱 장바구니도 확인했고, 근처 마트나 온라인 쇼핑 내역도 훑었는데 “이 냄비”라고 딱 말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가끔 쿠폰 들어가면 헷갈리는 경우가 있긴 한데, 이건 너무 노골적으로 새 제품 느낌이라서 더 미치겠는 거예요.
그 다음으로는 동네 이웃 가능성을 봤어요. 우리 건물 자체가 방음이 안 좋아서 누가 물건 옮기는 소리 정도는 들릴 수 있거든요. 그런데 냄비가 하나씩 생길 때마다 “누가 택배를 받는 소리” 같은 건 없었어요. 혹시 관리실에서 보관해뒀다가 전달해주는 건가 싶어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제가 너무 무서운 상상까지 해버려서 전화하기도 싫더라고요. 진짜로, 괜히 물어봤다가 “예? 그런 거 없는데요” 한 마디 듣고 혼자 더 쫄릴까 봐요.
그러다 제가 한 가지를 더 눈치챘어요. 냄비가 늘어나는 타이밍이 매번 “제가 장 보러 가기 직전”이랑 겹친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어제는 라면이랑 계란 사러 나갔고 돌아오니 싱크대 위 수납장에 뚜껑이 하나 더 들어가 있었어요. 오늘도 비슷했어요. “나 나가기 전에 누가 문 열었나?” 싶어서 방문 손잡이 쪽도 확인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고, 현관 잠금도 제가 늘 하던 방식 그대로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제가 최후의 수단으로 ‘기록’을 시작했어요. 냄비가 있던 위치를 사진으로 찍어두고, 수납장 문 열었을 때 손 닿는 감각까지 메모해놨어요. 그리고 다음 날, 똑같이 찍어보니 냄비가 또 늘어났습니다. 사진 속에 없는 냄비가 들어와 있고, 제가 위치 잡아둔 것과 달리 딱 한 자리만 새로 차지해요. 이상하게도 매번 같은 칸이에요. 마치 누가 “여긴 비워두겠습니다” 하고 날짜 기다리는 것처럼요.
여기서부터는 솔직히 웃기면서도 무서운 구간이 시작됐어요. 냄비를 세어보니 제 생각보다 최소 두 배는 늘어 있었고, 크기나 재질도 제 요리 스타일이랑 전혀 안 맞았어요. 저는 보통 라면 끓이는 정도라서 깊은 냄비가 필요 없거든요. 근데 늘어난 건 전부 들끓는 국물용, 볶음용, 뚜껑이 무거운 타입… 너무 “누가 요리하는 사람” 냄새가 나요. 그때 문득 든 생각이 하나 있었어요. 혹시 내가 밤에 잠깐 깨어서 무의식으로 장을 보고 냄비를 사는 건가. 아니면… 자취방이 나를 요리에서 해방시키려고, 스스로 장비를 갖추는 건가.
결국 오늘은 진짜로 마음을 다잡고 행동했어요. 내일은 제가 냄비 하나를 일부러 비슷한 걸로 새로 사서, 위치를 기록해두고 “다음 날 이 냄비는 어디로 갈까” 확인하려고요. 만약 또 내 기억엔 없는 냄비가 늘어난다면… 그땐 제가 관리실에 ‘정말로’ 물어볼 거예요. 그리고 혹시 누가 몰래 가져가려는 건 아닌지, 아니면 누가 제 방에 뭔가를 자꾸 두고 가는 건 아닌지 확인할 겁니다. 근데 솔직히, 제일 두려운 건 따로 있어요. 내일 냄비를 사러 갔는데, 이미 그 냄비가 집에 있으면… 그건 제가 아니라 누가 제 장바구니를 조종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지금 결론은 이거예요. 자취방에 냄비가 늘어나는 건 확실하고, 내 기억엔 하나도 없고, 제 자취 생활은 점점 “요리 예능” 세트처럼 변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수납장 여는 손이 살짝 느려졌는데, 냄비를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져요. 누가 챙겨주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제 뇌가 너무 허기져서, 냄비를 보고도 “오늘은 뭘 해먹지?”라고 착각하는 걸지도 모르겠고요. 어쨌든 내일은 진짜로, 냄비가 늘어나면 그건 제 의지로 늘어난 거라는 증거를 만들 겁니다. 아니면… 누군가가 제 방에서 “오늘도 냄비는 늘어야지” 하고 다짐했거나요. 저만 몰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