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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행사에서 내 부탁이 잊혀져도 아무도 모름

2026-07-10 00:41:13 조회 15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가족 행사에서 내 부탁이 잊혀져도 아무도 모름. 이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더라. 지난 주말에 친척들이 모인다고 해서, 나는 진짜로 “부탁”을 몇 개나 적어놓고 갔다. 문제는 그 부탁들이 내 손에서만 굴러다니다가, 행사장에서는 공중분해됐다는 거지.

그날 상황은 시작부터 좀 이상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과자랑 음료가 잔뜩 있었고, 삼촌은 “일단 다 준비됐으니까 편하게 와~” 이런 모드였어. 나는 일단 주최 쪽이랑 눈 마주치자마자, 엄청 정중하게 말했지. “고기 구워주실 때, 소스는 따로 그릇에 담아주세요. 아이들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혹시 알레르기 있는 분 계시면 라벨 확인도 한 번만요.”

게다가 나는 케이크도 하나 주문해뒀는데, 그 케이크가 일반 케이크가 아니라 장식이 중요한 타입이었거든. “초에 불 붙이기 전에 장식부터 사진 한 장만 꼭 찍어주세요. 제발요, 장식이 좀 깨지면 속상해요.” 이렇게 말까지 했어. 솔직히 부탁이라기보단 ‘작은 안전장치’ 같은 거였는데, 다들 “알겠어요~” 하고 고개만 끄덕이더라.

행사가 시작되고 나서도 나는 계속 주변을 살폈어. 삼촌은 부엌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는데, 소스 그릇은 안 보이더라. 그래서 슬쩍 “소스 따로 담아주신 거 맞죠?” 물었더니, 삼촌이 웃으면서 “어? 그거 그냥 옆에 있잖아~” 이러는 거야. 옆에 있긴 했는데, 그 옆은 사람들이 손을 뻗는 위치였고… 소스는 이미 고기에 범벅이 되어 있었지.

그 다음엔 케이크 순서가 왔어. 다들 숟가락 내려놓고 “자, 케이크!” 하면서 노래 부르는데, 나는 속으로 ‘사진 먼저!’ 하고 마음이 급해졌지. 그런데 막상 초를 붙이려는 순간, 누가 장식을 대충 만지면서 “어휴, 이거 왜 이렇게 복잡해요?” 하더라. 그 순간이 딱 내 부탁이 증발하는 타이밍이었어. 장식이 살짝 틀어졌고, 나는 웃으면서 “괜찮아요 괜찮아요” 했는데 속으로는 이미 약간의 멘탈 수리가 들어갔다.

여기서 더 웃긴 건, 아무도 “아, 내가 부탁을 까먹었네” 같은 표정이 아니었다는 거야. 소스는 원래 그렇게 섞는 게 당연한 것처럼 넘어가고, 케이크 장식은 원래 복잡해서 그런 것처럼 말이 바뀌었거든. 나는 조용히 다시 한 번 확인하려고 했는데, 그때 사촌 동생이 “오빠, 너 아까 뭐라고 했어? 소스는 그냥 같이 먹는 거 아니야?” 하고 묻는 거야.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이미 대답은 끝났더라. ‘가족 행사에서는 누가 먼저 기억해도, 누가 가장 늦게 말해도, 어쨌든 내가 틀린 사람’이 되는 느낌이랄까.

결정타는 알레르기 라벨 확인이었어. 누군가가 아이에게 과자를 주면서 “이거 맛있대! 너도 먹어~” 했는데, 나는 그제야 대상을 찾았지. 과자 봉투가 테이블 한쪽에 있었고, 라벨은 한참 아래에 붙어 있었는데 아무도 그걸 안 본 거야. 나는 얼른 “잠깐만, 이거 라벨 확인하고 주세요.” 했더니, 누가 툭 던지듯 “그런 거까지 봐야 돼?”라고 말하더라. 그 말이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당황했어. 내가 부탁한 건 성격 문제도, 예민함도 아니라 ‘기본 체크’였거든.

물론 행사 분위기는 계속 흘러갔다. 사람들은 음식 더 얹고, 사진 더 찍고, 웃고 떠들고, 어느 순간부터는 “오늘 참 잘 모였다” 같은 결론으로 화면이 전환됐어. 나는 그 흐름에서 자꾸만 작은 각주를 달고 싶었는데, 가족들은 각주를 본 적이 없더라. 그래서 나는 결국 “아하, 그냥 이 집에서는 내 부탁이 방송용 자막이구나” 하고 체념했지. 자막은 위에 떠 있어도, 리모컨은 다른 쪽으로 가는 거니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이 그러더라. “너도 너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다 잘 먹고 잘 놀았잖아.” 그 말이 웃긴 게, 나는 ‘잘 먹었는지’보다 ‘안전하게 먹었는지’를 걱정한 건데 말이야. 그래도 인정은 해줬어. 다음 모임엔 아예 부탁을 안 하기로. 대신 나는 준비물을 챙겨서 조용히 내가 직접 소스 따로 담고, 라벨도 내가 확인하고, 케이크 장식은 내가 손대지 말고 사진도 내가 찍으면 되잖아. 그렇게 하면… 적어도 가족 행사에서만은, 내 부탁이 잊혀져도 내가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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