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 얘기 나오면 갑자기 퇴근 빨라지는 상사
승진 얘기 나오면 갑자기 퇴근 빨라지는 상사가 우리 부서에 한 명 있습니다. 아니, “상사”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게, 평소엔 회의도 늦고 자료도 미루는 편인데 승진 이야기가 불쑥 나오면 그날부터 시간이 갑자기 빨라져요. 마치 누군가 타이머를 앞당겨 놓은 것처럼요.
처음엔 그냥 우연인 줄 알았죠. 인사 시즌 직전, 팀장님이 “이번에 평가 잘 받게끔 정리할 거 있으면 오늘 중으로 공유해요”라고 말했거든요. 그 순간 우리 상사는 펜을 쥐고 있던 손을 딱 멈추더니, 종이 한 장을 탁— 하고 제 책상 위에 놓고는 “나? 오늘 할 거 다 했으니까… 어, 저녁 약속 있어서요”라고 말하는데, 그 말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더라고요.
문제는 그 약속이 매번 ‘갑자기’ 등장한다는 겁니다. 평소엔 “오늘은 더 정리하고 가야지”를 입에 달고 사는 분이, 승진 얘기만 나오면 퇴근이 갑자기 30분 단위로 당겨져요. 점심 먹고 돌아와도 “어제 만든 자료 완성 안 됐는데” 하던 사람이, 오후 4시 10분에 “아 맞다, 저녁 회의가 있다” 이러고 바로 사라집니다. 그 회의는 매번 다른 팀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회의실에 나타나는 시간도 없어요. 그냥 사라져요.
그래서 우리 팀은 승진 얘기 나오기만 하면 공포가 먼저 옵니다. 회의록에 “차기 승진 검토” 같은 문장 하나라도 들어가면, 다들 눈치가 생겨요. 누가 자료를 더 만들었는지, 누가 보고를 먼저 했는지, 누가 지금 커피를 마시고 있는지… 그게 아니라도, 상사가 갑자기 “나중에 내가 정리해줄게” 하면서 슬금슬금 사라져서 일정이 늘 꼬입니다.
어느 날은 정말 황당했어요. 본부장님이 직접 “이번엔 성과랑 태도 같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상사가 그 자리에서 노트북을 닫더니 회의 끝나기 전에 일어나더라고요. 제가 “지금요?” 하고 묻자,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태도는 이미 보여줬잖아. 나는 정해진 시간에 착실히 퇴근하는 태도!”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칼같이 떨어지는 바람에 다들 웃지도 못하고 멍해졌죠.
그런데 더 웃긴 건, 그 사람이 퇴근하고 나면 일이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겁니다. 상사가 있으면 늘 “이 부분은 내가 다음에” “이거는 내가 확인하고” 하면서 미루던 게, 상사가 없어지면 갑자기 다들 손이 빨라져요. 마감이 코앞이 되니까 서로 자료를 공유하고, 오류도 잡고, 결국 제출은 되거든요. 그러면 결론은 하나예요. 상사가 늦게까지 있는 시간이 곧바로 작업 속도가 늘어난다는 법은 없더라… 물론 저 말 하면 또 “내가 길을 안내했지”라고 하겠지만요.
나중엔 우리 사이에서 별명이 생겼습니다. “승진 타임 딜레이 해제 상사” 뭐 이런 식으로요. 회의 중에 HR에서 한 줄이라도 “승진”을 언급하면, 상사가 늘어놓던 알림음이 먼저 울립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어, 문자 왔네” 하면서 바로 가방을 챙기거든요. 문자 내용이 승진 관련인지, 아니면 배달의민족인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 문자를 본 순간 퇴근 버튼이 눌리는 것처럼 움직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도 가만히 있진 않아요. 승진 얘기가 나오면 “상사님, 이거 내일까지 가능하실까요?” 같은 질문을 일부러 던져보거든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상사는 “가능하지. 다만… 나는 퇴근해야 해서 너희가 먼저 해줘야지” 같은 논리를 펼칩니다. 한마디로 “내가 할 일을 네가 먼저 해라”를 능숙하게 포장해요. 그리고 중요한 건, 포장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듣는 사람이 잠깐 멈칫해요. ‘아, 내가 알아서 해야 하나?’ 싶은 느낌.
그날도 승진 얘기가 나왔습니다. 팀장님이 “다음 달엔 평가가 있으니, 이번 주 안에 성과 정리해 주세요”라고 하자, 상사는 슬쩍 웃더니 또 그 특유의 표정으로 “응응, 잘들 하세요. 나는 오늘 일찍 가서… 내일도 생산적으로 준비할게”라고 했죠. 그런데 본인 말과 달리, 준비는커녕 집에 가서도 회의록에 있는 단어들을 재정의해서 메신저로 보내더라고요. 오전엔 퇴근 빠르고, 저녁엔 피드백 빠르고, 결국 우리만 계속 바쁘고… 승진의 핵심이 ‘결과’가 아니라 ‘타이밍’이라는 걸 그분이 몸소 증명한 셈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은 좀 놓여요. 상사가 퇴근 빨라지는 날엔, 우리도 결국 더 빨리 움직이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분 덕분에 우리는 승진 얘기가 나오면 더 단단해지고, 일정도 덜 흔들리고, 제출도 해내요. 언젠가 승진하든 안 하든, 어차피 우리는 그분의 퇴근 속도 덕분에 ‘마감 감각’이 자동으로 올라가 있겠죠. 오늘도 누가 “승진”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시계부터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참… 습관이 무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