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데이트 코스가 사실상 ‘오디션’
첫 데이트 코스가 사실상 ‘오디션’이었어요. 아니, 뭐랄까… “우리 그냥 편하게 밥 먹어요”라고 말한 사람이, 막상 만나고 보니 심사위원까지 데려온 느낌. 저는 그날 처음으로 ‘데이트’라는 단어가 ‘평가’랑 동의어였나 싶었습니다.
장소는 무난하게 카페였고, 저는 평소처럼 깔끔하게 입고 갔어요. 근데 들어가자마자 그분이 “아, 이 카페는 조명 맛집이더라”라고 하더니, 저를 쳐다보는 게 아니라 테이블 배치부터 스캔하듯 보시더라고요. 제가 인사하고 앉는 순간, 이미 머릿속에는 제 필기시험 답안이 정리된 상태 같았어요. 분위기는 로맨틱인데, 공기가 묘하게 압박감이 있었습니다.
대화도 신기하게 ‘질문-답변-감점’ 흐름이었어요. 제가 “여기 처음이에요”라고 하자, “처음이면 어떤 기준으로 고르세요?”라고 바로 이어서 묻더니, 제 답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썹이 살짝 움직였어요. 저는 그 미세한 표정을 보고 “아, 지금 제 말투가 채점 대상이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커피 주문도 제가 말하기 전에 거의 정해놓은 듯한 템포로 말하더라고요.
그 다음 코스는 생각보다 더 구체적이었어요. “밥 먹고 산책할 건데, 이동 동선이 중요해요”라고 하시더니, 지도 앱을 펼쳐서 제가 어떤 속도로 걷고 어떤 방향으로 따라올지를 보시는 것 같았어요. 제가 한 번 길을 잘못 따라가니까, 그냥 웃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여기서는 이쪽으로 가면 덜 헷갈려요”라고 아주 교육자 모드로 말씀하시는데… 마음이 좀 닫히더라고요. 아니 제가 길치라는 건 아실 수 있어도, 왜 시험 감독처럼 말씀하시는지.
산책 중에는 대화 주제도 과몰입이었어요. 저는 그냥 “요즘 뭐 재밌는 거 봐요?” 정도로 가볍게 던지려고 했는데, 그분이 먼저 “첫 데이트에서 제일 중요한 건요, 리액션의 타이밍이에요”라고 말해버리더라고요. 순간 저는 웃고 싶었는데, 웃으면 감점일 것 같아서 조심조심 대답했어요. 그분이 “그렇죠?”라고 물어볼 때마다 저는 리액션을 맞추려고 했고, 결국 제 표정이 자동으로 재생되는 기계 같아졌습니다.
그리고 제일 충격은 ‘취향 오디션’ 파트였어요. 길가에 작은 꽃집이 보이니까, 그분이 “여기 들러볼까요?”라고 하더니 꽃 종류를 설명하면서 제가 어떤 선택을 할지 미리 유도하는 느낌이었어요. 꽃을 고르는 제 손이 좀 망설이자, “망설이면 또 고민하는 스타일로 보일 수도 있어요”라고 툭 던지더라고요. 이건 뭐… 연애 상담도 아니고, 캐스팅 오디션 현장 같은 거예요. 저는 “아, 저는 그냥… 예쁜 거 고를게요”라고 말했더니 그분이 그제야 웃었는데, 그 웃음이 ‘통과’의 웃음 같아서 더 어색했습니다.
카페로 돌아와서 디저트를 고를 때는 아예 대본이 있는 듯했어요. 저는 “무난한 걸로요”라고 말했는데, 그분이 “무난한 걸 고르면 안정적이긴 한데, 가끔은 모험을 원하는지 확인해야 해요”라고 하시면서 메뉴를 한 장씩 넘기더라고요. 저는 그 말이 너무 진지해서, 결국 “저 모험은… 맛있으면 해요”라고 얼버무렸어요. 그분이 그때서야 크게 웃고 “이런 답변 좋아요”라고 해주는데, 와… 방금까지는 시험 보다가 갑자기 합격자 발표 듣는 느낌이었어요.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슬슬 ‘오디션’이 ‘게임’으로 바뀌더라고요. 그분이 갑자기 “지금부터 제가 설정할게요. 당신은 자연스럽게 반응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저는 “네?” 하고 멈칫했지만, 이미 진행된 상황이라 그냥 따라갔죠. “이 케이크가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주나요?” 같은 말을 진지하게 던지는데, 저는 웃지도 못하고 “달콤함과… 안심?”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리고 그분이 “오케이, 캐릭터 설정 통과”라고 말하니까, 그제야 숨이 좀 트였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의외로 말이 편해졌어요. 마지막에 그분이 “오늘은 우리 서로 어떤 방식으로 맞추는지 봤어요”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솔직히 “저는 그냥 편한 사이가 되고 싶었는데, 오늘은 너무 평가받는 느낌이라 조금 무서웠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근데 그 말을 꺼내기 전에 그분이 덧붙였죠. “그래도 당신이 끝까지 당황한 얼굴 잘 유지했잖아요. 그게… 귀여웠어요.”
결국 그날의 결론은 이거예요. 첫 데이트 코스가 사실상 ‘오디션’이었는데, 이상하게도 합격 기준이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당황해도 끝까지 따라오는 태도였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그날 제가 너무 진지하게 임해서 더 재미있었을지도 몰라요. 다음 데이트는 설마 “자연스러운 눈 마주침 3초” 같은 과제가 붙진 않겠죠? 붙으면… 저는 그냥 케이크 고르듯이 고르면 되니까, 그나마 희망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