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으로 구한 책, 안에 적힌 메모의 주인
당근으로 구한 책인데, 상태는 새것에 가깝다고 하더니… 정작 내가 받은 건 종이책보다 더 뜨거운 “기억” 한 봉지였다.
동네 인증샷 올린 판매자 분이 “희귀하게 안 읽어서 팝니다”라고 적어두셨고, 나는 솔직히 그 말에 낚여서 바로 결제했지. 택배 도착하고 뜯는 순간, 겉표지 냄새가 ‘도서관 갔다가 나온 느낌’이랑 비슷해서 기분이 좋았다. 책을 펼치는데, 첫 페이지 안쪽에 얇은 종이 조각이 껴 있는 거야. 설마 하고 꺼내 보니, 그 종이에 필기 메모가 촘촘히 적혀 있었다.
메모는 이렇게 시작했어. “이 책을 빌려준 사람의 이름을 나는 잊지 못한다.”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문장 끝이 묘하게 단단했어. 그 밑에 날짜가 있었고, 그 날짜는 내가 이 책을 산 당일이 아니라, 꽤 예전에 지나간 날이더라. 나는 웃어넘길까 하다가도, 이상하게 손이 멈췄다. 보통 중고책 메모는 ‘시험 범위’ 같은 실용적인 흔적이거나, 손주 이름 정도인데, 이건… 누군가의 마음이 그대로 붙어 있는 느낌이었거든.
두 번째 페이지를 넘기자 또 다른 흔적이 나왔어. 연필로 동그라미 쳐놓은 문장들이 몇 개 있었는데, 각 동그라미마다 옆에 짧게 코멘트가 달려 있었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이 문장은 혼자 있을 때 읽어야 한다” 같은 식으로. 대단한 문학적 찬사라기보단, 누군가가 정말로 그 문장을 붙잡고 버틴 흔적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책이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표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메모를 천천히 읽으면서 이상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어. 이 책을 처음 샀을 사람은 분명 누군가에게 빌려줬거나, 누군가에게서 받았을 거야. 그리고 지금은 그 인연이 끊긴 건지, 아니면 그냥 종이 속으로 숨겨둔 건지. 그러다 갑자기 페이지 사이에 작은 영수증이 하나 더 껴 있는 게 보였어. 구겨진 상태였는데 글자는 희미해도 가게 이름은 보이더라. 같은 동네에서 본 적 있는 서점 이름이었고, 나는 순간 “아, 이건 동네사람이 남긴 흔적이네” 하고 심장이 한 번 쿵했지.
메모의 마지막엔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실명이라기보단 별명처럼 보였어. ‘OO’로 시작하는데 중간 글자가 지워져 있거나, 일부만 남아 있었거든. 그걸 보는 순간 확신이 생겼다기보단, 괜히 괜찮은 사람을 엿보는 기분이 들어서 조심스러워지더라. 누군가의 사적인 기록을 내가 무단으로 읽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그래서 책을 닫고 한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어.
그러다 “이 메모 주인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이 너무 커져서, 결국 판매자 분께 메시지를 보냈어. 그냥 무작정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책 안에 메모가 있는데 혹시 어떤 분이 남기신 건가요?”라고만 물어봤지. 판매자 분은 답장이 꽤 빨리 왔고, 한 줄로 이렇게 적더라. “그 메모는 원래도 들어있던 거예요. 전 주인분이 남기신 거 같긴 한데, 저는 내용은 안 읽었어요.”
그 말을 읽고 나서 더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 그럼 판매자 분도, 그전 전 주인도, 그리고 결국 나도… 이 책을 ‘완성된 물건’으로만 샀을 뿐, 실제로는 메모의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돌고 있는 셈이잖아. 나는 잠깐 웃음이 나왔어. 책은 내가 구매했지만, 책 안의 마음은 계속 떠돌고 있네, 하고. 그래서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다시 펼쳐봤어. 그곳엔 작은 체크 표시가 있었는데, 누군가가 “읽는 동안 할 일”을 목록처럼 정리해뒀더라. 그리고 가장 아래에 딱 한 문장. “돌아가면, 그 사람한테 꼭 말하자.”
그 문장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어. 메모의 주인은 누군가에게 “말하자”가 목표였고, 그 목표가 이루어졌는지 여부는 종이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걸. 누군가에게 말했을 수도 있고, 아직 못 했을 수도 있어. 다만 중요한 건, 그 주인은 그 시간을 이 책 사이에 넣어뒀다는 사실이었지.
그래서 나는 책을 다시 조심히 포장해두고, 이번엔 내가 메모 한 줄을 얹기로 했어. “당근으로 받았는데, 당신의 문장이 아직 살아 있네요. 오늘도 잘 넘기고 있어요.” 누가 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책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넘어갈 때 누군가의 마음은 덜 외롭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지금은 책장 한 칸이 아니라, 작은 연락처 하나를 꽂아둔 기분이야. 당근으로 산 건 책인데, 결국 내가 건진 건 ‘주인을 찾는 대신, 주인의 마음을 이어받는 일’이더라. 덕분에 오늘도 책을 펼칠 때마다, 왠지 그 이름이 완성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