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하면서 한 번도 못 지킨 ‘분리’ 규칙
자취하면서 한 번도 못 지킨 ‘분리’ 규칙이 뭐냐면, 말 그대로 생활 속에서 분리수거를 “정직하게” 하겠다는 다짐이었어요. 근데 막상 자취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분리가 아니라 그냥… 생활이 통째로 섞이는 느낌이더라고요. 처음엔 엄청 당당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제 손이 분리의 원칙을 배반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자취방에 이사 오면 다들 쓰레기통을 세 개쯤 사잖아요. 저는 그걸 ‘분리의 성지 구축’이라고 생각했어요. 플라스틱, 캔, 종이, 마지막으로 종량제까지, 각자 역할이 있는 것처럼 딱딱 나눠 두고 “오늘부터 나는 성실한 인간이다” 같은 소설 주인공 모드로 살았죠. 근데 문제는 첫날부터 생겼습니다. 컵라면 용기 뒷면에 작은 글씨로 “이쪽으로 분리”가 적혀 있는데, 그 글씨가 제 눈을 조롱하는 것 같았어요.
분리 규칙이라는 게 참 묘합니다. 나는 분리하려고 마음을 먹는데, 물건이 자꾸 트집을 잡아요. 예를 들어 요구르트병은 비슷해 보여도 뚜껑은 또 다르고, 비닐 스티커가 붙어 있으면 그 순간부터 “이건 어디에 넣어야 하지?”가 시작돼요. 그래서 저는 한동안 원칙을 이렇게 바꿨어요. “판단이 안 되면 일단 모아두고 나중에”… 그리고 그 “나중에”가 제일 오래가더라고요.
처음엔 분리함 옆에 작은 메모도 붙였어요. “라벨 붙은 거 떼기!” “오염되면 헹구기!” “비닐은 비닐!” 이렇게요. 근데 문제는 헹구는 행위 자체가 생각보다 귀찮다는 거예요. 물 틀고, 설거지처럼 휘휘 하고, 냄새 제거하고… 이 과정이 제 머릿속에서는 ‘분리’가 아니라 ‘추가 노동’으로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결국 저는 “대충 안 오염이면 됨” 같은 타협을 했고, 그 타협이 어느새 제 원칙이 되었습니다.
특히 밤에 장 보면 망합니다. 낮에는 괜찮은데, 해 지고 나면 제 뇌가 버튼 하나를 눌러요. “오늘은 귀찮음이 우선이다.” 그러면 장바구니에서 나온 것들이 전부 제 손을 거쳐 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합니다. 종이팩이든 비닐이든 플라스틱이든, 그냥 한 번에 들어가요.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또 그 메모를 보면서 죄책감이 몰려옵니다. 어제 나는 왜 이렇게 살았지, 어제의 나는 어디 갔지, 이런 느낌으로요.
여기에 결정타가 있었어요. 어느 날 배달 오면 포장재가 너무 많잖아요. 뽁뽁이, 스티로폼, 테이프, 플라스틱 포장, 종이 박스, 비닐 봉투… 세상에 이건 분리라기보다 “분해 게임”이더라고요. 저는 포장을 뜯고 나서 제 속으로 계산을 해요. “이거 다 하면 몇 분 걸리지?” “지금 내 에너지 몇 % 남았지?” 그리고 놀랍게도 대부분의 날은 결론이 같았습니다. ‘그냥 한 번에 버리면 내일의 내가 해주겠지.’ 네. 내일의 저는 없었습니다. 있긴 한데, 똑같이 귀찮았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분리함이 제 방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장식품이 됐어요. 플라스틱 통을 열어보면 전날 남아 있던 것들이 이미 “혼합”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아 있고, 종이 통에는 젖은 종이가 섞여서 냄새를 내기 시작하죠. 그때부터 저는 분리 규칙을 지키는 게 아니라, 분리 규칙이 저를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변했어요. “그래도 어쩌다 한 번은 분리했잖아”라고 제 자신에게 말하는데, 그 말 자체가 이미 자책의 시작이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포기하진 못했습니다. 자취 생활이 길어지면 양심이 한 번씩 깨어나는 날이 오거든요. 예를 들면 비 오는 날, 바닥에 떨어진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보고 “이걸 내가 어떻게든 분리했어야 했는데” 싶어져요. 또는 누가 “분리 잘하고 계세요?” 같은 말을 해주면, 순간 자신이 모범 시민인 것처럼 굴고 싶어져요. 그날만큼은 진짜로 헹구고, 떼고, 분류하고, 종량제에 들어가야 할 게 아닌 걸 빼내려고 손이 바빠집니다.
근데 재미있는 건… 그 모범 모드가 유지되는 기간이 정말 짧다는 거예요. 보통 2~3일, 길어도 일주일. 그 이후에는 다시 “대충”이 돌아옵니다. 분리함 옆에 쌓인 봉투들을 보면, 제 삶이 어느 정도는 ‘정직함’이 아니라 ‘습관’으로 굴러간다는 걸 깨닫게 돼요. 결국 제가 지킨 건 분리 규칙이 아니라, 분리하겠다는 마음을 쓰레기통에 넣지 않고 계속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더라고요. 오늘도 버리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생각이 끝나기 전에, 또 손이 먼저 움직이겠죠. 어쩌면 분리는 제가 못 지키는 게 아니라, 제가 아직도 “분리 가능한 사람”이 되는 연습 중일지도 몰라요. 오늘의 쓰레기는 또 제게 도전장을 던지고, 내일은 제가… 또 어쩌다 한 번쯤 이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