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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랑 쇼핑 가면 꼭 생기는 ‘색상 전쟁’

2026-09-02 05:41:12 조회 9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가족이랑 쇼핑 가면 꼭 생기는 ‘색상 전쟁’이 있어요. 진짜로요. 백화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거 색이…”로 시작합니다. 문제는 색이 아니라, 그 색을 기준으로 집안의 권력 판도가 갈리는 게 더 무섭다는 겁니다. 저는 그냥 옷 몇 벌 사러 갔다가, 어느새 회의실에서 전략 짜는 사람처럼 됩니다.

처음엔 늘 사소해요. 엄마가 셔츠 하나 집어 들고 “이 색은 무난해서 좋지”라고 하죠. 그러면 아빠가 바로 받아칩니다. “무난하다는 말은 그냥 무슨 맛인지 모른다는 거야.” 엄마는 그 말에 표정이 굳고, 저는 슬쩍 가격표를 보며 탈출구를 찾습니다. 근데 그때 동생이 옆에서 한마디 얹습니다. “무슨 맛…? 그냥 하늘색이 제일 예쁜데.” 하늘색 한 마디로 전쟁의 깃발이 올라가요.

그 다음부터는 쇼핑 코스가 아니라 ‘색상 계보’ 탐방이 됩니다. 엄마는 베이지, 아빠는 검정, 동생은 파랑. 저도 모르게 “그럼 나는 회색 갈게” 같은 중립 선언을 하게 돼요. 그런데 가족은 중립을 싫어합니다. 중립을 선택하는 순간 “너도 결국 편을 든 거지”가 시작되거든요. 결국 저는 옷을 고르는 게 아니라 가족 모두의 취향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외교관’이 됩니다.

색상 전쟁의 핵심은 ‘설명’ 싸움이에요. 엄마는 따뜻한 톤, 조화, 피부가 편해 보이는 걸 논리처럼 말하고, 아빠는 때 안 타는 실용성, 어느 자리에도 어울리는 클래식함을 강조합니다. 동생은 유행, 사진 잘 나오는 분위기, 내 몸이 아니라 옷이 먼저 튀는 느낌 같은 감성 논리를 꺼내죠. 저는 물건을 집었다가 내려놓고, 또 집었다가 내려놓고, 그러다 손에 쥔 옷이 어느새 ‘증거물’이 되어버린 느낌을 받습니다.

가끔은 아예 색으로 작전이 갈립니다. “이번엔 가족 단체샷 찍을 거니까”라는 말이 나오면, 파랑 계열이 전면에 나서요. 반대로 “다음 주에 또 사람들 볼 거야”가 나오면 검정 계열이 승리합니다. 이상하게도 중요한 일정이 생기면 색이 바뀌고, 색이 바뀌면 역할도 바뀌어요. 엄마는 ‘단정’ 모드로, 아빠는 ‘실패 방지’ 모드로, 동생은 ‘스타일 경쟁’ 모드로 들어갑니다.

저는 이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자가 누군지 알아요. 바로 계산대에서 기다리는 제 시간입니다. 색상 하나 고르는데 20분이 훌쩍 지나가요. “이거랑 저거랑 뭐가 달라?” 같은 질문이 반복되면서, 점원은 어느새 심판이 됩니다. 점원도 참 힘들죠. “두 제품 모두 색감이 비슷하지만…” 같은 말을 하면서도, 결국은 고객이 아니라 가족의 감정에 맞춰야 하니까요. 그걸 보며 저는 속으로 “여긴 재판소인가, 쇼핑몰인가” 하고 중얼거립니다.

그리고 전쟁이 정점으로 치닫는 순간이 있어요. 바로 “너는 뭐 살 거야?”를 누가 던지느냐에 따라 판결이 갈려요. 제가 “그냥 편한 거”라고 하면, 엄마는 편함이 아니라 ‘톤’을 요구하고, 아빠는 편함이 아니라 ‘내구성’을 따지고, 동생은 편함이 아니라 ‘비주얼’을 원합니다. 결국 제가 뭘 사든 한쪽이 만족하지 못한 표정을 지으면, 그 표정이 다음 선택을 또 흔들어 버려요. 선택이 아니라 연쇄반응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쇼핑 가기 전에 전략을 짭니다. 옷을 보자마자 “저는 이 색이랑 이 색 사이에 있는 느낌 좋아요”라고 말해요. 그러면 엄마는 ‘베이지 느낌?’ 하고, 아빠는 ‘무난한 검정 섞인 건가?’ 하고, 동생은 ‘파랑 들어간 거 아니야?’ 하고 각자 자기 편으로 해석하더라고요. 제가 의도적으로 모호함을 주면, 가족이 그 모호함을 각자 방식으로 번역해버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색상 전쟁에서 살아남는 생존술이에요.

그래도 가끔은 정말 감동적인 순간이 생겨요. 모두가 갑자기 조용해지는 날이요. 제가 어떤 셔츠를 딱 들어보이면, 엄마도 “어… 이거 피부 톤 괜찮다” 하고, 아빠도 “이건 때 덜 타겠다” 하고, 동생도 “이거 입으면 사진 잘 나올 듯”이라고 합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말이 나오면 그건 거의 기적이죠. 저는 그때만큼은 가족이 저한테 옷을 사주는 게 아니라, 제가 중간에서 버틴 시간이 인정받는 느낌을 받아요.

결국 쇼핑이 끝나고 집에 오면, 늘 같은 결말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결국 자기 색을 하나는 챙기고, 누군가는 “그래도 괜찮네”로 체면을 살리죠. 저는 옷장 문을 열면서 생각해요. 오늘 산 건 옷이지만, 어쩌면 진짜로 산 건 가족의 취향을 버티는 제 멘탈 아닐까 싶습니다. 다음에 또 “색 뭐가 좋아?”가 시작되면… 저는 그냥 웃으며 대답할 거예요. “다 좋아요. 오늘은 다들 자기 색 찾아서 행복한 날이잖아요.” 그러면 정말로, 전쟁이 잠깐 멈추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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