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최신글
유머/짤방 유머 추천 0

회사에서 점심 메뉴 고를 때 늘 나만 대답함

2026-09-04 15:41:11 조회 8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점심 메뉴 고를 때마다, 이상하게도 나는 늘 “나만” 대답하게 된다. 진짜로 회사 단톡방을 열면 제일 먼저 뜨는 말이 있어. “오늘 뭐 먹지?” 그리고 그다음 내 휴대폰은 혼자 먼저 진동한다. 내가 답을 안 하면 다들 조용히 멈출 것 같은 기세로.

처음엔 내가 성실한 줄 알았다. 근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아무거나요”라고 쓰면, 사람들은 그걸 ‘아무거나 중에서도 결정은 네가 해’로 해석하더라. 그래서 나는 점심시간 11시 50분만 되면, 마치 프로젝트 매니저처럼 메뉴 리스트를 머릿속에 정리하게 된다. 오늘은 국밥? 덮밥? 샐러드? 분식? 결국 선택지는 늘 비슷한데, 내가 계속 정답처럼 굳어져 가는 느낌.

어느 날은 회의실에서 회의 끝나고 나와서 단톡을 봤는데, 누가 “피자 어때?”라고 묻더라. 나는 분명 “피자는 좋아요”라고 썼다. 근데 그 순간부터 댓글이 몰렸다. “그럼 피자로 가는 거야?” “OO님이 말했으니까 피자!” “결정권자 등장!” 이런 식으로. 나 진짜 결정 내린 적 없는데, 말 한 번이 곧 공문서가 되어버리는 느낌이라 멘탈이 은근히 닳는다.

그래서 타협을 시도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떠넘기기’ 전략. “저는 상관없어요, 다들 뭐 드실래요?” 이렇게 되게 민주주의적으로 썼다. 근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안 답한다. 다들 퇴근 생각에 잠겨 있는지, 아니면 내 질문을 ‘너가 알아서 해’로 다시 번역하는지 모르겠는데, 결국 마지막에 내 답이 다시 올라간다. “그럼 저는 오늘도… 제일 무난한 곳으로 가요.” 이 말이 왜 자동으로 나오는지, 내 손가락이 내 손을 배신한다.

점심 메뉴 고르는 게 단순한 선택처럼 보여도, 회사에서는 은근히 심리전이다. “매운 거 괜찮아요?”라고 누가 묻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누군가가 싫어할 가능성’을 계산하게 된다. 예민한 사람은 싫어하고, 단백질 좋아하는 사람은 닭가슴살 싫어하고, 탄수화물 좋아하는 사람은 라이스가 없으면 흥분한다. 결국 중간값을 찾아야 하는데, 그 중간값의 역할을 내가 담당하는 거다. 중간값이 아니라 그냥… 중간에서 계속 치이는 사람.

어느 날은 아예 물어보지 않는 날이 있었다. 내가 점심시간 직전에 커피 들고 들어오니까, 다들 이미 “아 그 집”을 정해둔 눈치더라. 나한테는 “OO님은 뭐 먹을래요?”라고만 던진다. 여기서 내가 또 “아무거나요” 하면, 또 그 ‘아무거나’가 만장일치로 포장된다. 그래서 나는 그날 처음으로 강하게 말했다. “저는요, 오늘은 메뉴 고르기에서 제외될래요.” 그랬더니 모두가 웃더라. 웃는 표정이 꼭 “드디어 깨달았네” 같은 얼굴이었는데, 웃음이 끝나자마자 똑같이 내게 물었다. “근데 오늘 뭐 먹을까요?”

그 순간 깨달았다. 내 역할은 메뉴를 고르는 게 아니라, 단톡방의 공백을 채우는 거였다. 사람들은 결정할 용기가 없고, 분위기는 흘러가야 하고, 그 흐름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편하거든. 나는 그 ‘흐름 잡이’가 된 거다. 그러니까 사실 나는 점심을 먹는 게 아니라, 사회적 윤활유를 제공하고 있었다. 한 끼에 회사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그런 건가? 너무 거창하지만, 느낌이 그랬다.

그래서 요즘은 방법을 조금 바꿨다. 매번 내가 답하기 전에, 일부러 질문을 뒤집어 버린다. “오늘 메뉴 고르는 거, 투표할까요?”라고 말해두면 다들 잠깐 멈춘다. 누가 투표하자는 말을 좋아하겠냐만은, 적어도 ‘결정’이 내 책임이 아니라는 문장을 심어두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투표가 시작되면 이상하게도 누군가가 “다수결로 가자”를 외치면서 분위기를 정리한다. 나는 투표 결과를 받아 적는 역할로 바뀐다. 물론 내 이름은 계속 후보 중 하나로 남아있긴 하지만.

그래도 제일 웃긴 건, 결국 내가 고른 메뉴로 다들 만족하는 날도 많다는 거다. 내가 대답을 잘해서가 아니라, 다들 결국 현실적인 선택을 하게 되더라. 어느 날은 내가 “무난하게 덮밥”이라고 했는데 다들 맛있다고 하더니, 그다음 날은 또 “오늘 메뉴?”라고 묻는다. 나도 나름 지쳤는데, 반사적으로 답을 치게 되는 손가락을 보면… 참 인간은 습관의 노예다. 점심은 먹고 살아야 하고, 회사는 돌고 돌아야 하고, 나는 또다시 질문에 대답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누군가가 진짜로 말하겠지. “오늘은 아무도 안 시킬게요.” 그날만 오면, 나는 드디어 점심시간에 휴식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말도 결국 내 차례로 돌아올까.

이 글 반응 남기기
추천과 비추천은 회원당 1회만 가능하며, 다시 누르면 취소됩니다.
추천 0 · 비추천 0
글 신고 안내
같은 회원은 같은 글이나 댓글을 1회만 신고할 수 있으며, 누적 신고가 5회 이상이면 자동으로 숨김 처리됩니다.
현재 글 신고 0회

댓글

댓글 작성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