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그때 그거’만 말하면 내가 못 알아듣는 이유
우리 집에는 전설의 대화가 하나 있어요. 가족들이 어떤 사건을 말할 때, 꼭 한 문장이 끼어듭니다. “그때 그거.” 끝. 장소는 안 말하고, 날짜도 안 말고, 등장인물도 대충 던져요. 근데 문제는 그걸 듣는 순간부터 저는 머릿속이 ‘뭐야 그게 도대체 뭐지?’로 자동 재생된다는 거예요.
처음엔 제가 그냥 멍청한가 싶었죠. 예를 들어 아버지가 거실에서 TV 보다가 갑자기 “그때 그거 있었잖아”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아, 무슨 그때요?”라고 물었고, 아버지는 “참, 너는 왜 매번 그래. 그때 그거라고” 하셨어요. 그 말이 무슨 암호 같아서, 저는 그날의 기억을 더듬느라 진짜로 오래 걸립니다.
엄마도 똑같아요. 냉장고 앞에서 “그때 그거 때문에”라고 시작하면, 저는 이미 정답을 찾으려고 수십 개의 가능성을 나열합니다. 이게 이사 얘긴지, 동네 축제 얘긴지, 혹은 친척이 왔던 날인지. 그런데 가족들은 그 질문을 싫어해요. 왜냐하면 그 질문을 하는 순간 “아니 너는 또 시작이다” 모드가 발동하거든요.
가장 얄미운 건, 가족들끼리는 그 문장 하나로 서로를 정확히 이해해요. “그때 그거”라고 하면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엄마는 “맞아, 그때 비 와서…”라고 바로 이어가요. 저는 그 짧은 연결고리를 못 찾아서, 마치 자막 없이 영화를 보는 느낌이에요. 영화는 재미있을 수도 있는데, 제가 이해하는 건 줄거리의 10% 정도고 나머지는 ‘공기’가 되거든요.
제가 진짜로 못 알아듣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가족들이 말하는 “그때 그거”는 제 머릿속에서 색깔 없는 화면으로 떠요. 특정 사건으로 고정되는 고유명사가 없으니, 제 기억 파일은 전부 후보에 올라오고 결국 분산돼요. 그러니까 저는 듣자마자 “단서 0개” 상태에서 검색을 시작하는 셈입니다. 검색을 시작했는데, 검색어가 “그거”면 결과가 나올 수가 없죠.
예를 들어 제가 잘 아는 사건은 이런 식이에요. “작년 겨울에 감기 걸려서 병원 갔던 그때”라든지, “초등학교 소풍 때 비 오던 날”처럼요. 그러면 제가 바로 이미지를 꺼내요. 그런데 우리 집은 항상 반대로 가요. “그때 그거”로 시작하고, 그 뒤에야 겨우 힌트가 붙습니다. 문제는 힌트가 붙기 전에 이미 제 뇌가 첫 문장에서 탈주해버린다는 겁니다.
어느 날은 제가 아예 작전 세웠어요. 가족들이 “그때 그거”라고 하면, 제가 바로 “그거”를 분류해보겠다고요. 그래서 이렇게 물었죠. “혹시 1) 이사 2) 결혼 3) 수리 4) 여행 중에 뭐예요?” 그러자 엄마가 한숨을 쉬더니 “너는 왜 자꾸 기준을 만들어”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는 “그냥 그때 있던 일이야”라고 말하고, 저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가족들은 제가 분류하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라, 제가 ‘대화의 규칙’을 새로 만드는 걸 싫어하는 거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결국 제가 선택하는 방식도 뻔해졌어요. “그때 그거”가 나오면 저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가요. 대신 집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을 제가 정확히 기억하게 되진 않지만, 싸움은 줄어듭니다. 다행히 가족들은 “설명은 필요 없어, 이미 이해한 표정만 있으면 돼”라는 쪽이라, 저는 가끔 능숙하게 연기를 하게 돼요. 손발이 안 맞아도 표정은 맞추는 인간이 되는 거죠.
그래도 가끔은 마음이 찝찝해요. “그때 그거”라는 말은 결국 대화의 속도를 지키기 위한 장치인데, 제 쪽에서는 그 장치가 자막 없는 번역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제가 제법 용기 내서 한 번만 정답을 요구해요. “아니 근데 진짜로, 그때가 언제예요?” 그러면 가족들이 웃어요. 그리고는 언제 그랬는지 정확히 알려주긴 하는데, 그 다음엔 또 “거 봐, 너도 알잖아”가 따라옵니다.
제가 못 알아듣는 건 제 능력 문제가 아니라, 가족들이 쓰는 문장에 제가 붙잡힐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결국 우리 집에서 “그때 그거”는 사건을 말하는 게 아니라, 가족들끼리의 생활 언어를 확인하는 신호 같은 거니까요. 저는 그 신호를 늦게 받아서 그렇지, 결국엔 다 이어지긴 하더라고요. 다만… 다음번엔 제발 “그때 그거” 말고 “그때 그거, 비 오던 날”까지만 부탁드려요. 저는 비 오던 날이 제 기억과 가장 잘 붙는 사람이라서요. 그게 저희 집의 유일한 합의입니다. 피식, 그걸로 또 한 번 서로가 이해했다고 넘어가면 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