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중에 ‘기념일’ 깜빡했는데 수습법 대성공
연애 중에 ‘기념일’ 깜빡했는데, 그날 저녁은 제 인생에서 가장 조용한 재난이었다. 평소엔 카톡 답장도 잘 하고, “당신 없으면 나 못 살아” 같은 말은 농담처럼 가끔 던지던 사람이 왜 갑자기 달력이랑 싸우다가 패배했는지, 그 순간 제가 증명해버린 거다.
문제의 기념일은 연애 시작 1주년. 저는 당연히 “이번 주에 뭔가 있지” 정도의 막연한 기억만 남아 있었고, 상대는 아예 티를 안 냈다. 티를 안 낸 게 더 무서웠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현관에서 향기부터 다르더라. 촛불 같은 건 아니고, 뭔가… ‘오늘은 특별하다’는 냄새가 느껴지는 날이었다.
저는 능숙하게 “오늘 뭐 먹을래?”를 던졌고, 상대는 “아무거나”라고 답했다. 그런데 말투가 아무거나가 아니라 ‘너 오늘 진짜 몰랐지?’인 아무거나였다. 그때부터 뇌가 계산을 시작했는데, 기억력의 계산 결과는 항상 0이었다. 심지어 저는 케이크는 안 샀고, 꽃도 없었고, ‘미안하지만 준비 중’ 같은 스토리도 없었다. 그냥… 맨손으로 사회생활 하듯 들어온 거다.
식탁 앞에서 상대가 조용히 휴대폰을 들더니, 캘린더 화면을 보여줬다. 날짜는 딱 그날. 저는 그걸 보는 순간 “아, 끝났다”가 아니라 “아, 왜 멀쩡히 장치가 있던 걸 제가 껐지”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서 수습을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은 “미안해”로 시작하잖아? 저는 “어제부터 계속 준비했어”라는 말을 하려다가, 아무것도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바로 전략을 바꿨다. 저는 주방 쪽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고, 그 안에서 가장 성실하게 빛나던 걸 꺼냈다. 계란이랑 식빵. 솔직히 말해서 그날 제 요리 실력은 ‘계란을 깨서 익히는 정도’였는데, 상대는 제 손이 움직이는 걸 보면서 표정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 “뭐 해?”라고 묻기에, 저는 “기념일은 챙겼어. 맛으로.”라고 말해버렸다.
여기서 진짜 수습 대성공은 ‘설득’이 아니라 ‘연출’이었다. 저는 식빵을 구워서 프렌치토스트 비슷하게 만들고, 계란은 반숙처럼 보여주려고 일부러 시간을 맞췄다. 그리고 접시에 뿌릴 게 없으니까, 설탕 조금에 계피가루가 있길래 그걸 써서 “이건 고급 레스토랑 스타일”이라고 우겼다. 상대는 처음엔 웃다가, 결국엔 “너 오늘 왜 이렇게 진지해?”라고 물었다.
그러자 저는 그제야 진짜 사과를 꺼냈다. “기념일 까먹은 건 맞아. 근데 나 오늘 너가 ‘괜찮다’고 말한 게 너무 마음이 아팠어. 그래서 그냥 미안하다고만 하면 내가 계속 똑같을 것 같아서… 내가 할 수 있는 걸로 보여주고 싶었어.” 말은 길었는데, 상대가 손으로 제 입을 막더라. “말로 수습하려는 거 말고, 먹어. 그리고 오늘은 네가 챙긴 날이야.” 그 한마디가 제 멘탈을 살렸다.
그 다음부터는 코미디가 아니라 진짜로 대화가 풀렸다. 상대는 “난 서운했는데, 네가 이렇게까지 하니까 덜 서운해졌다”라고 했고, 저는 “다음엔 절대 안 까먹을게. 대신 까먹더라도 이런 식으로 수습할게”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상대가 웃으면서 알려줬다. 웃는 얼굴로 “수습은 해봤는데, 또 까먹으면 그건 수습이 아니라 패턴이야”라고 하더라. 제 잘못은 인정했지만, ‘패턴’이라는 단어가 너무 정확해서 순간 부끄러웠다.
마무리는 은근히 여운 있게 갔다. 식사 끝나고 상대가 “내일은 네가 메모장에 오늘 날짜 다시 써. 알람도 해.”라고 했고, 저는 “네. 대신 이번엔 내가 알람 끄지 않을게. 알람이 나를 살려야지”라고 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문득 생각했는데, 연애에서 기념일은 날짜 자체보다 ‘서로를 기억하는 방식’이 더 큰 것 같다. 저는 까먹었지만, 그날은 우연히도 상대가 제게 원한 건 선물보다 ‘노력의 증거’였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지금도 제 휴대폰엔 그날 알람이 켜져 있다—물론, 제가 끄지 못하게… 알람 이름부터 “절대 까먹지 마”로 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