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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랑 전화할 때 항상 먼저 끊는 사람

2026-09-13 00:41:11 조회 10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우리 집에는 이상한 전통이 하나 있어요. 가족이랑 전화할 때 꼭 먼저 끊는 사람이 있거든요. 문제는 그 사람이 저라는 거죠. “나중에 또 전화할게!” 한 마디 하고 제가 먼저 툭 끊습니다. 상대는 보통 한 박자 늦게 “어…?” 하고 멈춰요. 그때부터 집안 분위기가 미묘해집니다.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요.

처음엔 별생각 없었어요. 어릴 때부터 전화하면 중간중간 ‘아 그래, 맞다’ 같은 멘트를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맞더라고요. 저는 그냥 통화가 길어지면 마음이 급해지는 편이랄까요. 마음속으로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하지?”가 떠오르는데, 그 순간부터는 제가 먼저 끊어야 뒤탈이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늘 먼저 끊습니다. 가족들은 그걸 또 다 알아요. 알아서 더 웃기죠.

엄마랑 통화할 때 특히 그래요. 엄마는 늘 같은 코스로 말을 시작합니다. “잘 지내? 먹었어? 요즘 어디 아파?” 같은 거요. 저는 대답을 하면서도 계속 머릿속 계산을 해요. ‘엄마 말이 끝나기 전에 내가 먼저 끊으면, 엄마가 걱정 모드로 더 달릴 시간을 줄여줄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이상한 논리로요. 그래서 엄마가 “그래도 너….” 하고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에 저는 먼저 끊습니다.

아빠랑 통화하면 더 심해요. 아빠는 질문을 던지면 대답을 다 듣고 싶어하는 타입이잖아요. 근데 저는 대답을 하다가도 갑자기 뜨는 생각이 있어요. ‘아빠가 지금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면 나 또 준비 없이 당황할 텐데?’ 그러면 제 손이 먼저 움직입니다. “아빠 나중에 전화할게!” 하고요. 아빠는 그 말 듣고도 보통 10초쯤 더 말할 기회를 찾습니다. 그런데 이미 저는 없죠. 전화를 끊은 사람만 아는 그 허무함이 있어요. 받는 사람은 그냥 멈춘 느낌이고, 저는 뭐랄까… 죄책감이 아니라 ‘완료 버튼 누른 느낌’이랄까요.

동생이 제 통화를 받으면 항상 바로 확인합니다. “형 왜 끊었어?” 같은 말이요. 동생은 제 행동 패턴을 이미 알고 있어서, 통화 시작 30초 안에 “이번엔 안 끊을 거지?”를 묻습니다. 저는 그러면 약간 승부욕이 생겨요. 이번엔 길게 해보자. 결심합니다. 근데 2분쯤 지나면 다시 같은 생각이 올라옵니다. ‘지금 길게 이어가면 또 할 말이 없는데…’ 이 생각이 마음을 몰아붙여요. 결국 또 저는 먼저 끊습니다. 동생은 그걸 “형의 자동 종료 기능 또 작동했네”라고 말해요.

가장 웃긴 건, 가족들이 제 먼저 끊는 패턴을 ‘배려’로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엄마는 어느 순간부터 “너 통화 오래 못 하더라, 그래도 전화는 해주네” 같은 식으로 정리해버립니다. 아빠는 “바쁘긴 바쁜가 보다” 하고 넘어가요. 동생은 “그래, 형은 전화하면 뇌가 꺼져” 같은 농담을 얹고요. 저는 그때마다 생각합니다. 내가 진짜 배려하고 싶은 건 “나 전화해야 하는데 말이 길어질까 봐 무서워”라는 내 마음인데, 가족들은 그걸 다르게 해석해요.

그래서 저는 요즘 변명 스크립트를 연습합니다. 통화 전에 머릿속으로 문장을 몇 개 준비해두죠. “엄마 내가 먼저 끊는 건…” “아빠 지금 바빠서…” “동생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문제는, 스크립트를 준비하면 할수록 더 빨리 끝내고 싶어져요. 준비한 문장을 쓰는 순간이 부담이거든요.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요. 결국 손은 또 전화를 끊습니다. 스크립트는 늘 시작만 하고 끝까지 못 가요. 삶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편집본 같아요.

어느 날은 엄마가 먼저 전화를 걸고, 저는 받자마자 일부러 천천히 말해보려고 했어요. “엄마 나 지금 괜찮아.” 이렇게요. 엄마도 “그래, 오늘은 좋네” 하면서 목소리가 편해졌죠. 저는 여기서부터가 관건이라 생각했어요. 엄마가 편해지면 저는 오히려 빨리 끊어야 할 것 같아요. 왜냐면 편해진 상태를 오래 유지하면, 다음에 뭔가가 더 나오고 대화가 더 깊어질 것 같거든요. 그러다 결국 저는 또 “엄마 나중에 전화할게!” 하고 끊어버렸습니다. 엄마가 말하려던 소리가 멈춘 걸 들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요. 끊긴 건 전화인데, 분위기는 이미 끊긴 거죠.

이제는 가족들이 저를 ‘먼저 끊는 사람’이라고 거의 고정 캐릭터처럼 부르더라고요. 통화 전에 다들 한마디씩 합니다. “이번엔 안 끊는다며.” “형, 마지막 인사 제대로 해.” “끊지 말고 그냥 숨만 보내.”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그 말들 덕분에 한 번씩은 성공할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3분 통화하고도 끊지 않고 끝까지 “잘 지내”를 주고받을 때. 그날은 제 마음이 좀 덜 불안해요. 그리고 가족들은 대단한 성과처럼 반응합니다. “오늘은 꽤 오래했네!” 그 말 한 줄에, 저는 또 생각해요. 그러게… 오래 통화하는 것도 결국 ‘기술’이 아니라 ‘용기’였구나. 문제는 그 용기를 찾는 순간에도 제가 제일 먼저 버튼을 누를 때가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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