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갑자기 생긴 ‘회의 없는 회의’
회사에서 갑자기 생긴 ‘회의 없는 회의’가 진짜 레전드였다. 오늘 아침부터 아무도 회의 의제를 잡지 않았는데, 팀장님이 “잠깐만요” 하시더니 회의실 앞에서 공지부터 하시길래 다들 설마 했지. 근데 그 설마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 있었어. 우리 팀은 회의실에 들어갔고, 회의는 시작됐는데, 회의 안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처음엔 다들 웃으면서 넘어갔다. “오늘은 뭐 준비할 게 있대?” “혹시 결재 같은 거?” 같은 소리 오갔는데, 팀장님은 노트북도 켜지 않고 그냥 앉으셔서 한 손은 턱에 괴고 한 손은 마우스 위에 올려두셨다. 그러다 시간이 5분 지나도 아무 말이 없으니까, 그때부터 분위기가 이상해졌어. 누가 먼저 말 꺼내면 안 될 것 같은 공기였거든. 말 한마디가 곧 ‘의견 등록’으로 처리될 것 같은 느낌.
그래서 각자 행동이 완전 동기화됐다. A는 화면을 열었다가 닫고, B는 메모장을 켜놓고 아무 것도 안 쓰고, 나는 슬쩍 팀장님 얼굴만 번갈아 보면서 고개 끄덕이는 연습을 했다. 다들 “아무것도 없는데도 고개는 끄덕여야 하는 회의”라는 걸 본능으로 알아챈 거지. 팀장님이 기침을 한 번 하시자마자 모두가 동시에 정신 차린 표정을 지었고, 그게 또 신기하게도 반응이 정확히 맞아떨어졌어. 우리 팀은 리액션 템플릿이 있는 조직이 맞나 싶더라.
그다음부터는 진짜 회의 없는 회의의 핵심이 나왔다. 팀장님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셨어. “자, 오늘은 회의 없이 회의하겠습니다.” 설명이 붙을 줄 알았는데 설명은 없었다. 그냥 그 문장만 던지고는 다시 말없이 앉아 계셨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회의실 공기가 확 두꺼워졌고, 다들 ‘회의 없는 회의’가 무슨 의미인지 스스로 해석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어떤 사람은 “생산적인 공백 시간을 갖자”라고 해석했고, 어떤 사람은 “회의를 안 했는데 회의 결과가 필요하다”라고 해석했어.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이 회의는 안건이 아니라 상태 점검에 목적이 있다는 걸. 팀장님은 계속 말은 없지만, 누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는지, 누가 제일 먼저 커피를 마시는지, 누가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어떤지까지 전부 관찰하는 듯했거든. 그러다 팀장님이 갑자기 나를 보시더니 “지금 표정이 좀 어둡네요”라고 하셨어. 나는 당황해서 “네, 생각 중이었습니다”라고 했는데, 팀장님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셨어. 그 한 번의 끄덕임이 마치 평가표에 스티커 붙이는 느낌이라 너무 웃기면서도 무서웠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아무 말이 없으니 우리는 회의에 참여한다는 사실만으로 뭔가를 해내야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들 서로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어. “혹시 오늘 회의가 종료되면 뭘 하면 좋을까요?” “혹시 회의록은 누가 작성하죠?” 같은 질문을 해버리면 그 자체로 기록이 남을 것 같아서, 다들 표정만 질문하고 말은 최소로 했지. 그러다 팀장님이 드디어 한 문장을 추가로 던졌어. “다음 회의는 더 짧게 하겠습니다.” 이 말 하나에 다들 안도했다. 적어도 끝이 있겠구나 싶었거든.
그런데 끝은 또 다른 방식으로 왔다. 팀장님이 갑자기 노트북을 켜더니, 화면에 파일을 하나 띄우고 아무 내용을 입력하지 않은 상태로 프린트 버튼만 누르시더라. 프린터가 “삑” 하고 종이를 한 장 뽑아냈는데, 종이에는 제목만 크게 적혀 있었다. ‘회의 없는 회의 결과’ 그 아래 칸은 텅 비어있었고, 아무도 어디에 뭘 적어야 하는지 몰랐어. 팀장님은 그 종이를 테이블 가운데에 딱 놓고는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했지. 그래서 우리는 그냥… 텅 빈 결과물을 들고 일어났어.
회의가 끝나자마자 진짜 기묘한 후폭풍이 왔다. 팀장님이 바로 메신저로 이런 걸 보내셨어. “오늘 회의는 의제 없이도 합의가 된 것 같습니다. 각자 업무에 반영 부탁드립니다.” 반영? 뭘 반영? 우리 업무는 원래 하던 대로 돌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회의 없는 회의 결과’라는 종이만 사무실 여기저기에 돌아다니기 시작했어. 어떤 팀원은 그 종이를 액자처럼 책상 위에 올려뒀고, 어떤 팀원은 프린트가 공짜일 거라는 희망을 품고 복사본을 더 뽑으려다 혼났더라.
결국 우리 팀은 그날 이후로 ‘회의 없는 회의’라는 말을 농담처럼 돌리기 시작했어. 신규 입사자는 그걸 듣고 “그럼 회의는 언제 해요?”라고 물었는데, 선배가 “회의는 있어요. 다만 의제가… 안 보여요”라고 대답하더라. 나도 그날 이후로 회의실 문을 열 때마다, 혹시 오늘은 종이 한 장에 내용 없이도 평가가 시작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더라. 그날의 피식 웃음은 사실 약간의 여운이 남았어. 왜냐면 우리 회사는 회의가 없는 게 아니라, 회의가 내용을 먹지 않고도 돌아간다는 걸 확인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