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모임에서 내 몫 술잔이 너무 빨리 비는 이유
가족 모임 날이면 늘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밥상 깔리고 술병이 등장하는 순간, 내 앞에 놓인 술잔만 유독 빨리 비어버린다. 나는 분명 “오늘은 천천히 마실게요” 하고 마음먹는데, 잔은 어느새 바닥을 자랑하듯 말끔해진다. 문제는 비는 속도만 빠른 게 아니라, 비는 걸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아이고, 이거 내가 따라줄게!” 모드로 들어간다는 거다. 그럼 또 내가 멈출 틈이 없어진다.
처음엔 내가 긴장해서 잔을 빨리 비운 줄 알았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의도적으로 한 모금만 하고 기다려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누가 건드리기 전에 이미 내 손이 잔을 향해 가 있다. 술잔이 버튼처럼 작동하는 느낌? 거기다 가족들은 다들 얼굴에 “술은 예의”라고 적힌 사람들이다. 특히 큰아버지는 잔이 비면 바로 옆사람을 보고 “우리 조카는 원래 잘 마시지!” 같은 멘트를 던지는데,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내 잔은 타이밍 맞춰 다시 차오른다.
결정타는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내 잔에 술을 따르실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질문만 남는다. “엄마, 내가 언제 비웠는데?” 어머니는 내가 아무 말도 하기 전에 능숙하게 채워주시고, 나는 그걸 말없이 받는다. 그리고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잔을 받는 순간부터 손목이 자동으로 돌아가며 한 번 더 들이켜 버린다. 옆에서 누가 “어어, 천천히!” 하면 오히려 더 빨라진다. 마치 내가 속도를 올려서 반박해야 하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이쯤 되면 ‘내가 술을 빨리 마시는 체질인가?’ 싶어서 스스로를 분석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술맛은 또 천천히 느껴진다. 목 넘김도 천천히, 속도도 천천히. 그런데 잔이 비는 건 빠르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 빨리 마셔서 비우는구나”로 보일 수 있겠지만, 내 속은 이미 체감 과학이다. 나는 분명 천천히 마시는데도 잔이 내려가면, 그 아래에서 누가 술을 끌어당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래서 결국 결론을 내렸다. 우리 집엔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 있다. ‘가족 모임 자동 리필 장치’. 내가 술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 누군가의 눈빛과 손동작이 이미 다음 행동을 예약해둔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는 잔을 보자마자 “야, 너 요즘 일이 많다면서?” 같은 질문을 던지고,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느라 입이 잠깐 멈춘다. 그런데 그 사이 내 잔은 이미 반쯤 차 있어 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아, 맞다” 하고 한 모금 더. 질문-대답-추가 리필의 루틴이 완성되는 거다.
게다가 잔만 비는 게 아니라, 내 컵 위의 체감 온도도 이상하게 빨리 떨어진다. 따뜻한 것도 아닌데 손바닥이 차갑게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실수로 잔을 더 빨리 들이켰나? 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알고 보면 반대로다. 차가워지면 오히려 빨리 마셔야 마음이 편해진다. “아, 빨리 끝내야지”라는 인간의 자기 합리화가 가동되면서, 잔은 다시 비고, 가족들은 다시 따르고. 이건 술자리가 아니라 순환 논리 시험이다.
그날은 결정적으로 삼촌이 나를 시험대에 올렸다. 삼촌이 내 잔에 막 술을 따르는데, 내가 제일 소심하게 “저는… 오늘은 좀 천천히 마셔볼게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삼촌 표정이 아주 진지해졌다. 그리고 “천천히 마시는 사람은 내가 속도를 맞춰줘야지” 하더니, 아주 천천히—정말 천천히—내 잔을 비슷한 속도로 따라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천천히가 내게는 더 빨리 느껴졌다. 왜냐면 나도 ‘천천히면 괜찮겠지’ 하고 방심하는데, 방심하는 순간 내 입이 자동으로 잔을 비우기 시작하니까. 결국 잔은 순식간에 빈다. 그러면서 삼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응, 나도 알고 있어.”
나중에 생각해보니, 가족 모임에서 술잔이 빨리 비는 이유는 술 때문이 아니라 관계의 압력 때문이었다. 누가 따르고, 누가 말하고, 누가 기대하는 표정이 있으면 사람은 그 기대를 외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잔을 ‘마시는 행위’라기보다 ‘응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잔을 비워야 대화가 이어지고, 잔을 채워야 화기애애해지고, 잔이 비어야 또 웃음이 생긴다. 즉 내 술잔은 내 몸이 아니라 분위기의 심장 박동기였다.
마지막으로 그날 가장 웃겼던 건, 집에 돌아와서 내가 혼자 잔을 씻는데 드디어 깨달았다는 거다. 잔 바닥에 작게 금이 가 있었는데, 그 금 사이로 아주 살짝씩 술이 스며나간 흔적이 있었다. 아주 티 나게 새는 정도는 아니고, 대신 조금만 기울어도 남은 술이 거의 사라지는 수준. 그래서 나는 천천히 마신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잔이 은근히 손실을 처리하고 있었던 거다.
결국 가족들이 “넌 빨리 비우네”라고 한 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원인은 내 주량이 아니라 잔의 배신이었다. 다음 모임에는 새 잔을 들고 가기로 했는데, 그때 가족들이 또 이렇게 말하겠지. “새 잔이면 더 많이 넣어야지.” 그 말이 들리는 순간, 나는 또 알아버린다. 우리 집에서는 잔이 비는 게 아니라… 분위기가 비는 걸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