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해준 말 한마디 때문에 기분이 바뀐 날
그날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가족이 해준 말 한마디 때문에 기분이 통째로 바뀐 날이었어요. 아침부터 약간 꼬인다고 해야 하나요. 알람은 제대로 안 울리고, 지하철은 늦고, 점심은 메뉴 고르다 시간 다 써서 결국 제일 대충 집어 든 걸 먹었거든요.
회사에서도 그런 식으로 계속 “아 오늘은 왜 이러지?” 싶은 연속이었어요. 실수는 두 번이나 했고, 보고서 제출도 마감 직전에 겨우 넘겼는데, 상사는 눈도 안 마주치고 그냥 “다음부터는 좀 더 확인해봐”라고만 하고 지나가더라고요. 그 한마디는 나쁘다기보다, 그냥 제 마음이 이미 바닥을 찍고 있어서 더 퍽퍽하게 들렸어요.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을 때도 분위기가 그 모양이었어요. 현관문 열자마자 신발 정리도 대충 하고, 가방을 툭 내려놓고 바로 주방으로 가서 물부터 찾았죠.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찬물 한 컵을 먼저 내주시는데, 그게 더 서운했어요. “나 그렇게 티 나나?” 싶어서요.
그런데 그때 아빠가 티브이 리모컨을 손에 쥔 채로 거실에서 한마디를 툭 던졌어요. “오늘 힘들었지?”라고요. 사실 아무도 제가 속상한 걸 공식적으로 물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저는 그 말이 더 놀라워서 한참 말이 안 나왔어요. 아, 지금까지 내가 혼자 티 내고 있었나?
엄마도 옆에서 “너 요즘 말투가 좀 급해”라고 하더니, 잠깐만 쉬었다가 다시 말했어요. “아무리 바빠도, 네가 스스로한테 너무 몰아붙이는 건 아니지?” 그 말이 이상하게도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어요. 그동안 나는 남한테만 잘 보이려고 애썼구나 싶은 순간이랄까요. 기분이 나빠서 화가 난 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괜히 화내고 있었던 거죠.
저는 “그냥 좀 꼬였어요. 다들 그렇잖아요”라고 둘러대려고 했는데, 아빠가 “꼬인 날이야. 근데 너는 꼬인 날에 더 세게 자책하더라”라고 딱 잘라 말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제가 오늘 실수했던 것들을 하나씩 콕 집어 “이건 실수 맞는데, 중요한 건 네가 그 다음에 어떻게 했냐는 거야”라고 아주 담담하게 정리해줬어요.
그 말이 마음에 확 꽂힌 이유는, 사실 제가 오늘 내내 ‘실수’만 생각하고 ‘회복’을 놓치고 있었거든요. 보고서 제출을 했고, 메신저로 확인도 했고, 결국은 일을 끝내긴 끝냈는데도 머릿속에서는 맨 처음에 잘못한 장면만 반복 재생되고 있었어요. 가족이 해준 말 한마디가 그 재생 버튼을 꺼버린 느낌이랄까요.
저는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 멍해 있다가, 결국 “나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나봐”라고 말했어요. 엄마는 “당연하지. 힘든데 티를 안 내면 더 힘들어 보이잖아. 그리고 너는 원래 잘 버티는 사람이니까, 버티는 모습만 보여서 우리가 몰랐던 거지”라고 웃더라고요. 아빠도 리모컨을 내려놓고 “다음부터 확인하라는 말은 맞아. 근데 확인이 다가 아니라, 오늘 같은 날 너를 안 다치게 하는 게 먼저야”라고 했고요.
그날은 놀랍게도 집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이 편해졌어요. 원래는 누워서 폰만 보다가 잠들 생각이었는데, 거실 바닥에 앉아서 내일 할 일 메모를 다시 정리했어요. 실수했던 포인트도 “다음엔 이렇게”로 바꿔 적고, 뭐가 문제였는지 감정 말고 상황으로 분해해봤죠. 그런데 그걸 하면서도 이상하게 스트레스가 덜했어요. 누가 혼내는 게 아니라, 누가 방향을 같이 잡아주는 느낌이라서요.
자기 전에 엄마가 “내일 아침은 내가 깨워줄게”라고 말하더라고요. 저는 웃으면서 “괜찮아요”라고 했는데, 속으로는 감사해서 약간 울컥했어요. 아침에 정말로 깨워주면서도 별말 없고, 제 머리 위로 손 한번 얹는 게 전부였는데 그게 또 너무 따뜻해서요. 가족이 해준 말 한마디 때문에 기분이 바뀐 날, 결국은 거창한 위로나 대단한 해결책이 아니라 내가 나를 너무 몰아붙이지 않게 해주는 한 문장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가끔 제일 힘든 날이 오면, 그때 들었던 말이 먼저 떠올라요. 오늘 꼬였으면, 내일은 내가 나부터 제대로 챙겨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