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잠깐만”이 2시간 되는 마법
회사에서 “잠깐만”이 2시간 되는 마법을 처음 체감한 건, 내가 막 팀장님 옆자리에 앉은 첫 주였다. 출근해서 커피 내려놓고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싶을 때쯤, 팀장님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아주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잠깐만.” 그 한마디가 내 하루를 통째로 잡아먹을 줄은 그때 몰랐다.
처음엔 진짜로 2분쯤일 줄 알았다. 팀장님이 “이거 엑셀 좀 다시 정리해줘” 하면서 노트북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려주셨거든. 나는 “네, 바로요” 하고 마우스를 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 팀장님이 덧붙였다. “잠깐만, 내가 확인할게. 아, 그리고 이거 담당자한테도 물어봐야 해.”
확인은 무슨 확인인지 모르겠는데, 팀장님이 화면을 보시면서 계속 “음…” 하시더니 갑자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내 앞에서 10분짜리 회의를 하듯 통화를 길게 이어가셨다. 나는 엑셀에서 셀을 만지다가 말고, 또 셀을 만지다가 말고, 결국 “잠깐만”이란 단어가 시간을 접는 기능이 있는 말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렇게 첫 번째 “잠깐만”이 끝나기도 전에, 두 번째 “잠깐만”이 등장했다. 팀장님이 통화를 끝내시더니 “아니, 잠깐만. 내가 방금 말한 거랑 숫자 바뀌는 거 있더라.” 하시면서 엑셀 파일을 새로 열었다. 그리고는 “이건 내가 할게, 너는 일단 이거 양식만 맞춰놔”라고 말씀하셨다. 양식 맞추는 게 사실 제일 오래 걸리는데, 그걸 모르시는 건지 아시는 건지… 아무튼 마법은 계속됐다.
점심 전까지 나는 엑셀, 메신저, 구글링, 그리고 ‘혹시 이거 잘못하면 혼나는 거 아닌가’ 같은 생각을 번갈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팀장님은 작업 중간중간 “잠깐만, 이 문장 톤이 좀…” 하면서 문서 스타일을 바꿔주셨다. 나는 저장을 누를 때마다 마음이 조용히 쿵 떨어졌다. 누가 봐도 “잠깐만”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나중에 니가 지칠 때’의 의미로 쓰이는 단어였다.
오후가 되자, 팀장님이 또 한 번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잠깐만, 이거 회의 전에 준비해야 하니까 네가 발표 자료도 한 장만 만들어.” 나는 한 장이라고 들었는데, 그 한 장이 슬라이드 다섯 장으로 변하는 과정은 정말 드라마였다. 내용은 “핵심만”이었는데, 핵심은 늘어나는 스타일이었고, 늘어난 만큼 다시 수정해야 해서 결국 문서 버전이 세 개가 됐다. 나는 파일명을 ‘최종’으로 시작했다가 ‘최종2’, ‘최종진짜마지막’까지 가는 걸 스스로 목격했다.
그러는 동안 팀장님은 내가 힘들어하는 표정을 눈치채셨는지, 아니면 그냥 마법이 원래 그렇게 굴러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팀장님은 종종 내 옆에서 메모를 보더니 “잠깐만, 이거 숫자 출처는 뭐로 할지 정하자”라고 하셨다. 출처를 정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고, 출처를 찾는 데도 시간이 걸렸고, 출처가 맞는지 확인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계가 한참 앞으로 가 있었고, 나는 점심 먹은 시간이 기억에서 흐릿하게 지워질 정도로 시간이 증발해 있었다.
결국 그날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회사에서 “잠깐만”은 시간의 길이를 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 원하는 완성도까지의 거리를 재는 말이라는 걸. 누군가는 “잠깐만”이라고 하면 정말 짧을 거라고 믿지만, 이곳에서는 “잠깐만”을 들은 순간부터 내 하루가 팀장님 일정에 흡수된다. 마치 예약 없이 들어온 방문객처럼.
퇴근할 때쯤,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다음에 누가 “잠깐만”이라고 하면, 나는 먼저 물어보기로. “잠깐만이 몇 시까지예요?” 라고. 물론 그 다짐을 실제로 말할 용기는 다음 날 아침 커피 향과 함께 또 증발했다. 어쩌면 우리 회사에선 그 용기도 마법에 포함돼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안다. “잠깐만”은 시작 버튼이고, 2시간은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은 미리 저장을 해두자, 최종진짜마지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