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하다가 상대가 너무 성실해서 오히려 부담
썸에서 연애로 넘어간 지 한 달쯤 됐을 때였어요. 근데 문제는, 제가 연애를 “적당히” 즐기는 스타일이라는 거고 상대는 반대로 “적당히”가 없는 사람이더라고요. 처음부터 약속 시간은 5분 전, 연락은 보고 싶을 때만이 아니라 생활 루틴처럼 꾸준하게, 그리고 대화도 빼박 내용 점검하듯 이어지니까… 솔직히 말해 처음엔 좋았어요. 좋은데요, 어느 순간부터 제가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죠.
상대는 정말 성실했어요. 출근하면 출근했다고 바로 말해주고, 점심시간엔 “지금 뭐 드세요?” 하고 물어봐요. 퇴근하면 퇴근했다고 끝내고 끝이 아니라, 집에 도착하면 도착했다고 또 말해요. 저는 ‘도착했나?’ 싶을 때쯤 연락하는데, 그 사람은 ‘도착했어요’가 기본값이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늦게 답하면 “바쁘세요?” 같은 다정한 질문이 오는데, 그게 너무 성실해서 오히려 마음이 얼어붙는 느낌이었어요. 다정한데, 다정한 속도가 제가 따라가기엔 빠르다는 거죠.
그리고 데이트 방식이… 진짜 성실 그 자체였어요. 제가 “오늘은 그냥 걷자” 하면, 그 사람이 지도 켜고 주변 카페부터 산책 코스까지 딱 정해서 오더라구요. “괜찮아요, 제가 찾아봤어요”라는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오니까, 저는 오히려 선택권이 없는 기분이 들었어요. 내가 제안한 건 ‘그냥’이었는데, 상대는 ‘그냥’을 계획으로 바꾸는 사람이니까요. 결국 데이트가 늘 알차게 끝나는데, 그 알참이 저한테는 숙제처럼 쌓였어요.
연애 초반엔 칭찬도 과하게 성실했어요. 저는 어떤 칭찬을 받으면 “아 고마워요” 하고 끝내고 싶거든요. 근데 그 사람은 칭찬을 받으면 바로 이유까지 정리해줘요. “어제 그 말이 좋았어요. 그때 표정이…” 이런 식으로요. 듣는 입장에선 감동인데, 제가 감동받을 틈도 없이 평가가 이어지니까 결국 ‘내가 지금 잘하고 있나?’라는 생각부터 들더라고요. 연애가 아니라 면접 보는 줄 알았어요. 연애 면접관이 따로 있는 기분이랄까요.
문제는 연락만이 아니었어요. 상대는 대화도 성실하게 해요. 제가 가끔 “요즘 좀 피곤해요”라고 말하면, 그냥 위로로 끝내지 않고 “어제 몇 시에 잤어요? 오늘 일정은 어때요? 스트레칭 했어요?” 같은 질문이 이어져요. 전 위로가 필요할 때도 있고 그냥 말로 툭 던져놓고 싶은 날도 있거든요. 근데 상대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전부 데이터로 받아서 처리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점점 “피곤해요” 같은 말 자체를 줄이게 되더라구요. 솔직히 말해 피곤하면 피곤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상대가 너무 성실하게 대응하니까 말이 무거워졌어요.
그래도 처음엔 제가 적응하려고 노력했어요.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연락 템포도 조금씩 맞춰보려고 했죠. 근데 맞추다 보면 제 하루가 변해요. 아침엔 답장 타이밍 맞추고, 점심엔 사진 보내고, 저녁엔 대화 이어가고. 그러다 보니 어느 날엔가 문득 “나 지금 연애 중이 아니라 관리 중인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순간부터 저는 상대의 성실함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성실함을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겼어요.
결정적으로 마음이 꺾인 날은 약속이 없던 날이었어요. 전 원래 쉬는 날엔 그냥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하거든요. 근데 상대는 “오늘은 편한 날이죠? 편하게 쉬면서도 제가 생각해주는 건 괜찮죠?” 이런 말을 하면서 연락을 끊지 않더라고요. 저는 쉬고 싶은데, 상대는 ‘쉬어도 연결은 유지’가 기본값이니까요. 그날 밤에 저는 결국 속으로 ‘나를 좋아하는 건 고마운데, 좋아하는 방식이 너무 정확해’라고 생각했어요. 정확하면 좋을 때도 있지만, 제 마음은 갑자기 “오차 허용”이 필요해졌거든요.
그래서 저는 조심스럽게 얘기했어요. “너무 성실해서 고마운데, 가끔은 그냥… 느슨하게 해도 좋을 것 같아요”라고요. 근데 상대는 제 말을 듣고도 바로 “그럼 제가 템포를 조절해볼게요”라고 하더라구요. 여기서 또 성실함이 터진 거예요. 제가 ‘느슨하게’라고 말한 건 “원래대로 돌아가자”는 의미였는데, 상대는 “조절해야지”라고 받아들여버려요. 그 다음부터 연락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질문이 줄어들고 대신 체크가 늘었어요. “오늘은 답이 늦으시네요? 괜찮으세요?” 이렇게요. 결국 느슨해지긴커녕, 다른 형태의 완벽함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서로 각자의 방식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졌어요. 상대는 성실함을 버리기보다 속도를 조금 늦추는 법을 배웠고, 저는 내 마음의 여유를 조금씩 늘려야 했어요. 완벽하게 해결된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성실함이 저를 압박하는 느낌에서 “내가 모른 척하고 있던 배려”로 바뀌더라구요. 아직도 제가 계획을 세우면 그 사람이 더 잘 짜고, 상대가 배려를 하면 제가 부담을 느끼는 순간이 가끔 오긴 해요.
근데 지금 생각하면 웃겨요. 연애하다가 성실해서 부담이라니, 얼핏 보면 반대인 줄 알잖아요. 근데 진짜로 겪어보면 알아요. 성실함은 좋은데, 그걸 ‘상대의 속도’로만 받아들이면 결국 내 마음이 따라가느라 지치는 거더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렇게 부르기로 했어요. 상대는 “성실 담당”이고, 저는 “느슨하게 되는 연습 담당”. 이름은 거창한데 사실 둘 다 그냥 인간이라서… 가끔은 서로의 숙제를 같이 미뤄주게 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