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운전하다가 내비가 갑자기 말 안 듣는 날
차 운전하다가 내비가 갑자기 말 안 듣는 날이 있었거든요. 출발할 때만 해도 “네, 안내 시작합니다~” 하던 그 내비가, 신호 앞에서부터 갑자기 멈칫하더니 제 머릿속까지 같이 멈춰버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냥 평범하게 길 가고 있었는데, 내비가 제 뜻대로 안 되는 순간부터 하루 전체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더라고요.
처음엔 당연히 네비가 꼬인 줄 알았어요. 회사 가는 길이라 익숙한 코스였고, 도로도 그럭저럭 직관적이어서 “설마 지금 위치만 조금 틀렸겠지” 하고 넘겼죠. 그런데 좌회전하라는 지점이 오는데도, 내비는 아무 소리도 안 내더니 화면만 멀쩡하게 켜져 있는 겁니다. 볼륨을 올려도 소용없고, 경로를 재탐색해도 반응이 없어요. 화면은 지도로만 버티고 있는데, 목소리는 완전 잠수 상태.
그래도 운전은 해야 하니까 저는 무심하게 따라가려고 했습니다. 이 도로는 예전에 몇 번 타봤고, 좌회전만 하면 쭉 빠지면 되니까요. 문제는 ‘예전에 몇 번’이라는 게 함정이더라고요. 내비가 말은 안 하니까, 제가 “아 여기쯤이겠지” 하고 감으로 판단했는데, 신호는 계속 지나가고 교차로는 계속 다른 쪽으로 열리잖아요. 그때부터 제 손은 스티어링을 잡고 있는데 머리는 “내비야? 어디 갔어?”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갓길에 살짝 차를 세워서 리셋을 해봤어요. 전원을 껐다 켜도 똑같더라고요. “음성 안내를 켜세요” 같은 문구가 뜨긴 하는데, 그 문구가 뜬 순간부터 이상한 게 시작됐습니다. 뭔가 설정 화면을 눌러도 터치가 먹히는 듯 안 먹히는 느낌? 손가락은 열심히 누르는데 내비는 표정 없는 채로 멍하니 지도를 보여주고만 있었습니다. 그때 제 머리가 딱 하나로 정리됐어요. 아, 오늘은 내가 길 찾는 날이 아니라 내비가 나를 시험하는 날이구나.
다시 출발해서 경로를 다시 선택해보려고 했는데, 이게 또 웃긴 게 있어요. 내비는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라고 표시만 하고, 그 다음엔 아무 진행도 안 돼요. 그래서 저는 지도 위에 점 하나가 움직이는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조금 돌렸는데, 그 점이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제 차는 분명히 움직이고 있는데도요. 그래서 저는 운전하면서 내비를 계속 의심했죠. 혹시… 내가 지금 내비가 있는 좌표를 지나가고 있는 게 아니라, 내비가 내 시간을 지나가고 있는 건가?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찜찜했습니다.
그 와중에 옆 차선에 있던 트럭 운전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쭉 가고 있고, 저는 “내비가 말 안 해도 괜찮아, 난 길 알어” 같은 자신감을 품다가 곧바로 자신이 모르는 길로 들어갔습니다. 도로가 바뀌면 표지판을 봐야 하는데, 표지판을 볼 틈을 주기 전에 교차로가 한 번 더 나와요. 제가 브레이크를 살짝 밟는 순간, 내비 화면에는 아주 당당하게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라고 떠버렸습니다. 저는 진짜로 멈칫했어요. 목적지에 도착한 적이 없는데, 제 인생만 도착한 느낌? 내비가 갑자기 한 박자 늦게 인사하는 기분이랄까요.
그래서 이번엔 더 과감하게 내비를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알았어, 너 오늘은 말하기 싫은 거지?” 하고, 표지판을 따라가며 운전했죠. 그런데 또 신기한 일이 생겨요. 제가 목적지 근처로 갈수록 내비가 다시 시동을 거는 것처럼, 음소거 모드가 풀린 듯 화면이 깜빡이더니 갑자기 소리를 냈습니다.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늦게 나오는지, 마치 제가 이미 정답지를 제출하고 나서 교무실에서 “아… 이건 시험범위가 아니었네요” 같은 타이밍이었어요. 저는 웃음이 나올 뻔했는데, 운전 중이라 입꼬리만 올라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회사 주차장에 들어가고 나서야 제가 진짜로 뭘 잘못했는지 깨달았습니다. 내비가 말 안 했던 게 아니라, 제 설정이 이상했더라고요. 음성 안내가 “최저”로 내려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경로 음성이 꺼져 있던 것도 아니었어요. 단 하나, 제가 전에 주차할 때 블루투스 연결을 잘못 건드렸던 건지, 내비가 차 스피커가 아니라 다른 출력으로 소리를 내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내비는 나름 열심히 말하고 있었는데, 저는 차 안이 아니라 제 앞머리 속에서만 못 듣고 있었던 거죠.
그날 이후로 저는 내비를 믿는 법도 바꿨어요. “내비가 시키는 대로만 가자”가 아니라, “내비가 말이 늦으면 표지판 먼저 보자”로요. 그리고 무엇보다… 내비가 갑자기 장난치듯 “도착했습니다”를 띄워도, 제가 먼저 당황해서 마음부터 목적지로 날아가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차 안에서 내비가 말을 안 들으면, 그건 대개 제 마음이 먼저 말을 걸고 있는 거더라고요. 오늘도 제 내비는 열심히 듣는지 확인하고 운전합니다. 완전 귀찮지만, 그 귀찮음이 다음 번엔 사고를 막아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