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하다가 상대가 싫어하는 메뉴를 몰랐던 날
연애하다가 상대가 싫어하는 메뉴를 몰랐던 날, 그날 이후로 저는 “미리 물어보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늦은 사람”으로 인생 포지션이 바뀌었습니다. 진짜로요. 별것 아닌데도, 괜히 제 성격이 ‘대충 알아도 말해줄 필요 있지’ 모드로 굳어져 있어서, 그 작은 실수가 생각보다 오래 갔어요.
그때 우리가 데이트한 날이 유독 날씨가 좋아서, 저는 자신감이 엄청 났습니다. 맛집을 찾아갔는데 웨이팅이 길지 않았고, 메뉴판이 딱 제 스타일이었거든요. 저는 “오늘은 내가 쏜다” 마인드로 주문부터 척척 진행하려고 했어요. 그리고 그때, 상대가 평소에 잘 먹는 편이어서 더 안심했죠. 아, 이 사람은 뭘 먹어도 좋아하겠지, 싶었습니다.
문제는 메뉴 하나였어요. 저는 그 가게에서 유명한 메뉴가 있길래, 그걸로 가자고 말했죠. 상대도 처음엔 “오 괜찮다” 정도로 리액션이 있었고, 주문도 끝났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상대가 갑자기 말 수가 줄더라고요. 저는 그게 그냥 설렘 때문인 줄 알았어요. 근데 자세히 보니까, 표정이 살짝 굳어 있는 거예요.
음식이 나오고 나서부터는 제가 눈치를 못 본 게 아니라, 눈치를 보는 제가 무시당한 느낌이었어요. 상대는 한 입 먹더니 잠깐 멈칫하더니, 억지로 웃으면서 “생각보다… 향이 진하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맛있잖아, 더 먹어”라고 응수했는데, 그 순간부터 알 수 있었어요. 이건 ‘맛있다’가 아니라 ‘참고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짜로 수습하려고 했습니다. 메뉴를 바꾸기엔 이미 나왔고, 다음 메뉴를 시키는 건 제 자존심이 허락을 안 했고요. 대신 “혹시 싫어하는 메뉴였어?”라고 조심스럽게 물었죠. 근데 상대가 그제야 조용히 고개를 젓습니다. 그리고 “난 이 메뉴, 예전에 한 번 먹고 나서 계속 싫었어. 근데 넌 그런 얘기를 한 번도 안 해줘서 몰랐지”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뇌가 잠깐 리셋되는 걸 느꼈어요. ‘내가 몰랐다’에서 끝이 아니라, ‘내가 확인하지 않았다’로 결론이 바뀌는 느낌이랄까요. 상대는 미안하다고도 안 했어요. 오히려 “네가 나한테 맞춰주려는 건 알고 있는데, 이런 건 메뉴 말고 그냥 내가 말해줘야 되는 걸까?” 같은 톤이었어요. 전 그 말이 너무 정직하게 들려서, 아무 말도 못하고 젓가락만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때 저는 괜히 더 열심히 굴었어요. “그럼 내가 같이 먹을게” 하면서 제 접시에 덜어 먹는 척했는데, 상대는 그걸 보더니 “아니야, 굳이 그러지 마. 그냥 말해줬으면 됐어”라고 툭 던졌습니다. 그 한마디에 저는 아, 내가 지금 ‘서비스’하려고 했지 ‘배려’하려고 한 건 아니었구나 싶었어요. 배려는 타이밍이랑 분위기랑 같이 오는데, 저는 그걸 메뉴판처럼 딱딱 맞추려고 했던 거죠.
결국 그 메뉴는 반쯤은 제 몫이 됐고, 반쯤은 거의 그대로 남겼습니다. 가격도 적지 않았는데 버린 건 또 아니고, 애매하게 남겨서 포장해 가긴 했는데요. 문제는 포장보다 마음이었어요. 계산할 때 상대가 “다음엔 메뉴 고를 때 한 번만 물어봐”라고 말하더라고요. 그 말이 대단히 거창한 요구는 아닌데, 저는 그게 왠지 ‘연애의 기본 스킬’처럼 들려서 더 쑥스러웠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세상에서 제일 쉬운 질문을 하게 됐어요. “이거 좋아해?” “이런 향 괜찮아?” “전에 싫어했던 메뉴 있나?” 같은 말들이요. 처음엔 좀 귀찮다고 느꼈는데, 해보니까 귀찮은 게 아니라 편하더라고요. 상대는 그 질문을 받으면 오히려 마음이 풀리는 게 보여서, 제가 잘하고 있다는 착각이 아니라, 그냥 서로 속 편해지는 구조였던 겁니다.
그리고 가끔은 아직도 그날을 생각해요. 누가 보면 별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오래 기억나냐고 묻는다면… 저는 답을 간단히 할 것 같아요. 그건 메뉴가 싫었던 게 아니라, 제가 상대의 ‘기억’을 내 쪽에서 지도로 업데이트하지 않았던 날이라서요. 오늘도 데이트 시작하면, 저는 메뉴판보다 먼저 상대 표정부터 확인합니다. 주문은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요. 마음이 굳기 전에, 제가 먼저 물어보면 되더라고요.